일상의 온전함(Integrity)에 대하여

넷플릭스에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영화를 찾다가, 토르로 잘 알려진 크리스 헴스워스 주연의 <Extraction> 1,2편을 보게 되었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용병이 벌이는 무모한 구출작전이 그 내용인데, 크리스 헴스워스와 한 팀을 이루는 아랍계 여배우의 묘한 매력의 잔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여배우의 이름은, 골시프테 파라하니. 이란계 배우로써 자국의 여성인권에 대해 비판하다 입국을 금지당하고 지금은 프랑스에 거주하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다가,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작품을 발견하곤 곧바로 넷플릭스에서 찾아보았다. 운좋게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였는데, 그 제목은 <패터슨(Paterson)>. 이름부터가 예술가의 풍모를 잔뜩 풍기는 짐 자무쉬 감독의 2016년작으로, 골시프테 파라하니와 함께 아담 드라이버가 주연을 맡았다. 짐 자무쉬에 아담 드라이버라니, 이만하면 우연히 찾아본 영화 치고는 꽤 만족스럽지 않은가?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만족감은 발견의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예술작품을 비교한다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지만, 내 관점에서는 아담 드라이버의 또다른 대표작, <결혼이야기> 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줄 만 할 정도로 매우 감동적인 영화라 할만 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패터슨>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즈음, 최근에 본 또 다른 영화,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타르>가 오버랩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도 패터슨과 타르라는 두 인물의 삶이 완벽히 대척점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이 두 영화 속 인물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려 한다.

#시를 쓰는 어느 소도시의 버스운전사, 패터슨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의 작은 도시인 패터슨에서 버스를 운전하며 살아간다. 그는 버스 운전으로 생계를 꾸려가지만 그의 정체성은 버스 운전사가 아니라 시인이다. 그는 하루하루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도 비범한 시선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시상을 이끌어 낸다. 컵케이크 파티쉐와 컨트리 뮤지션을 꿈꾸는 아내와 매일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한 다음, 버스 운전석에서 잠시 시를 다듬고 나서 동료의 실없는 푸념을 들어준다. 낮에는 온종일 버스를 운전하며 승객들의 이런저런 대화들을 듣곤 하며, 퇴근한 뒤에는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함께 저녁을 먹고, 사랑스러운 불독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 동네 모퉁이의 어느 바에서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 패터슨의 하루 일과이다. 물론 틈 날 때마다 그는 시를 쓰고 다듬는다. 영화는 2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패터슨의 일주일을 담아내는데, 하루하루가 같은 듯 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같다. 패터슨의 일상은 얼핏 단조롭고 물질적으로 빈곤해 보이지만, 기실 모든 순간 모든 하루가 온전하며, 그 모든 것들은 오롯이 패터슨의 것이다.

#넘볼 수 없는 업적을 이룬,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 타르
타르는 미국 빅5 관현악단의 지휘자를 거쳐, 세계 최고 명성의 베를린 필하모닉 여성 지휘자를 맡고 있다. 음악계에서 여성들을 가로막던 유리천장을 스스로 깨부수고 있으며,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 또한 숨기지 않는다.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재단에도 참여하고 있고, 팬데믹 이후에 말러의 교향곡 5번 공연 실황을 녹음함으로써 역사에 한 획을 그으려 한다. 이렇듯 완벽해 보이는 삶을 구축한 타르는, 그가 가진 권력을 남용하여 젊은 음악인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괴롭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신세가 된다. 투명하리만치 단순한 패터슨의 삶과는 정반대로, 타르의 그것은 겉과 속이 전혀 다르다. 인터뷰에서 ‘나는 비평을 읽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정작 언론에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예민할 정도로 신경 쓰고, 여성음악인들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듯한 리더십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독보적인 지위를 지키기 위해 잔인하리만치 냉정한 행위를 일삼는다. 자신의 파트너인 샤론과 딸을 아끼는 듯 하다가도, 집을 비우고 멀리 출장을 떠나서는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샤론의 전화는 받지도 않는다. 사상누각, 또는 허상과도 같은 타르의 일상은 온전함과 거리가 멀다.

#정체성의 위기
‘가난하지만 자족하는 삶’과 ‘화려하지만 공허한 삶’의 고루한 대비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두 편의 영화, 그리고 패터슨과 타르라는 두 인물을 보면서 ‘내 삶을 얼마나 온전한가?’에 대해 자문해 보게 되었다. 나는 패터슨처럼 오롯이 나라는 ‘단독자(單獨者, der Einzelne)’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타르처럼 사회적 지위, 맥락, 관계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허상인가? 40대가 되면서 친구들과 몇 번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명함 속 회사, 직업, 직책, 직급, 하는 일 등, 소위 말하는 계급장 떼고 나면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같은 맥락에서,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일론 머스크는 ‘앞으로 AI와 자동화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게 되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재화가 풍부해 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걱정해야 할 것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과연 어디에서 정체성을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산업화 이후, 인간은 자신의 직업에서 정체성을 찾아왔는데, 앞으로는 어디에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자아성찰이 필요하다
헨리 키신저, 에릭 슈미트, 대니얼 허튼로커가 함께 쓴 <AI 이후의 세계>를 보면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정보에 맥락이 더해질 때 지식이 된다. 그리고 지식에 소신이 더해지면 지혜가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소신이 생기려면 홀로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용자에게 수천, 수만, 수억명의 의견을 쏟아부으며 혼자 있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면 용기가 위축된다. 용기는 소신을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하며, 특히 새로운 길, 그래서 대체로 외로운 길을 걸을 때 중요하다. 인간은 소신과 지혜를 갖출 때만 새로운 지평을 탐색할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는 지혜가 생길 여유가 없다. 디지털 세상에서 중시되는 덕목은 자아성찰이 아닌 타인의 인정이다. 그래서 디지털 세상은 이성이 의식의 요체라는 계몽주의의 명제를 위협한다.”

#일상의 온전함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패터슨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인정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시를 통해 세상과 교감하며, 어린 소녀가 들려준 자작시를 곱씹으며 다른 우주를 만난다.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사상누각을 불안하게 쌓아가던 타르와는 달리, 패터슨에게는 애초부터 무너질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패터슨은 온전히 패터슨이고, 그의 이름이 그가 평생 살아온 고향 도시인 패터슨과 같은 것은 짐작컨대 패터슨의 온전한 삶에 대한 짐 자무쉬 감독의 시적 표현이리라. 그렇다면 내 이름 석 자는 어떠한가. 어디까지가 사상누각이고 어디까지가 오롯이 내 것일까. 얼기설기 엮어온 관계, 커리어, 소비, 소셜미디어 계정, 이런 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내 삶과 일상은 얼마나 추레할까.

#온전한 삶을 위하여
사실 ‘온전하다’는 표현보다는 영어로 ‘Integrity’ 라고 쓰는 편이 더 적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진실하고, 그 자체로 완전하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인 상태.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까발려도 아무 거리낄 것이 없는 상태. 패터슨은 그런 상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타르는 까발리면 끝모르게 무너지는 사람이다. 내 일상에 있어 온전한 순간을 억지로라도 찾아보자면, 책을 읽고, 커피를 내리고, 사랑스러운 내 강아지와 산책하는 순간. 고향인 제주 남쪽 바다의 끝없는 수평선에 넋을 놓는 순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순간. 그리고 직업적으로 온전한 경험은, 별다른 수식어를 동원하지 않고 “저는 세탁을 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단순명료함을 바탕으로 동료들과 함께 하루하루 성장해 나아가는 것. 이런 온전한 순간들을 걷어내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훅 불면 날아가버릴, 별 의미없는 시간들의 더미가 아닐까 싶다. 감히 시인의 삶에 닿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내 삶이 조금은 더 온전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죽음’에 대한 소고(小考)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연휴는 그 날짜 수에 걸맞는 긴 호흡의 생각을 이어갈 수 있는 매우 드물고 소중한 기회이다. 게다가 미혼인 나는 명절에 챙겨야 할 가사(家事) 또한 많지 않은 덕분에 그 소중한 기회를 톡톡히 누릴 수 있어 언제나 만족스럽다. 이번 연휴에는 아래 소개할 두 편의 작품 덕분에 특별히 의미깊은 생각들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지라, 그 기억을 짧은 글로 남기고자 한다.

첫번째 생각 -<숨결이 바람될 때(When Breath Become Air)>,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 지음

긴 호흡으로 곱씹어야 할 생각의 단초를 끄집어 내는 데 있어 가장 좋은 수단은 역시나 ‘책’이다.  이번 연휴에 어머니를 모시고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긴 여유 속에 읽으려고 책장에 꽂아 두었던 <숨결이 바람될 때(When Breath Become Air)> 를 보스턴백 한 켠에 잊지 않고 챙겨 넣었다. 여행이 꼼꼼하고 알차게 준비되었을 때의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여정에 어울리는 책 한 권은 그 만족감에 있어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깃털 하나가 그려진 단촐한 이 책을 마주한 느낌이 바로 그러하였다.

나는 부산발 삿포로행 비행기 안, 홋카이도의 JR 기차, 그리고 오타루와 비에이의 료칸에서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눈으로 즈려 밟았다.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 라는 전도유망한 신경외과의가 불과 30대의 나이에 암에 걸려 투병하면서도 담담하게 혹은 치열하게 죽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 내려 간 이 책의 페이지를 나는 단 한 장도 허투루 넘겨버릴 수 없었다. 보편적인 인류애, 가족에 대한 헌신, 환자에 대한 사명감,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까지,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저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류의 양심을 벼리고 싶다’ 던 젊은 날의 저자는 ‘지금에 와서 내 영혼을 들여다 보니, 연장은 너무 약하고 불은 너무 뭉근해서 인류의 양심은 커녕 내 양심조차 벼리지 못했다’며 죽음 앞의 숙명적인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저자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품위있고 의연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남은 이들의 삶을 더욱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저자의 인격,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같은 평범한 사람조차도 결국은 죽음 앞에 패배로 끝맺을 것이 명백한 삶의 순간순간에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는 용기를 잠시나마 품게 만드는 것이다.

두번째 생각 –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Ken loach) 감독

연휴를 이틀 남기고 서울로 돌아와 렌즈에 담긴 어머니와의 추억을 정리하고 나서, 존경해 마지않는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를 감상했다. 2016년 깐느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이 명작에서 나는 켄 감독의 전작 <앤젤스 쉐어(The Angels’ Share)> 에서 웃으며 눈시울을 붉혔던 우화적 위트를 기대하였지만, 지난 4년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세상에 분노한 감독은 위트를 걷어내고 더욱 명징한 목소리로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묵묵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은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후, 당분간 일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얼토당토 않은 행정처리로 인해 질병수당 지급대상에서 제외된다. 이의제기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다니엘은 하는 수 없이 구직수당이라도 받기 위해 시늉에 불과한 구직활동을 계속하게 되지만, 정부의 허울좋은 의무조항들로 인해 다니엘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마저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스스로도 곤궁해 처한 다니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케이티와 그의 두 아이들을 마치 친가족처럼 돌본다. 다니엘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위는 다름 아닌 ‘시민의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가난 때문에 눈물 흘리는 케이티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라고 보듬는 다니엘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정부의 사회보장제도에는 결여된, 이웃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가득찬 것이었다. 다니엘은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책무를 다하고 자존감을 지키려 애썼지만 그의 심장은 결국 그의 몸을 지켜주지 못하고 만다.

한 편은 에세이고, 한 편은 영화이지만 <숨결이 바람될 때>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 는 죽음에 대한 시선을 묘하게 교차시키며 나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해 주었다. 한 개인이 죽음에 맞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어디까지 고양시킬 수 있는지, 반대로 한 사회가 죽음에 맞선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 추락시킬 수 있는지, 그 대척점을 잇기가 무척이나 힘겨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결국 죽음 앞에 패배한다는 사실이다. 전쟁에서의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전투에 임하여서는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 의 용기를 가질 만 하다. 그처럼 담담히 나아가다보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삶이란 애초부터 존재하는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되리라. 다만, 밤하늘의 별들과 같은 수많은 삶들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그 빛을 잃어야만 하는 참담한 상황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다. 다니엘의 삶은 폴의 그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다. 폴도 <나, 다니엘 블레이크> 를 보았다면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 믿는다.


촛불과 모난 돌의 레토릭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견한 바 있는 금융가이자 사상가인 나심 니콜 탈레브는 그의 탁월한 저서 <안티프라질(Antifragile)> 의 첫 장을 이렇게 썼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지지만 모닥불의 불씨는 되살아 난다(Wind extinguishes a candle and energizes fire).”

(번역서의 문장은 “바람은 촛불 하나는 꺼뜨리지만 모닥불은 살린다.” 이지만 ‘바람’ 보다 ‘불’ 이 주어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의역하였음.)

한편, 춘천시를 지역구를 하고 있는 국회의원 김진태는 지난 11월 12일, 광화문에 모인 백만 여 개의 촛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촛불은 촛불 일 뿐, 결국 바람이 불면 다 꺼지게 되어있다.”

김 의원의 눈에는 백 만 개의 촛불이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제각각의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나, 그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이 백 만 개의 촛불이 기실은 모닥불, 어쩌면 성난 들불과도 같은 것이며, 바람이 불면 그 불길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무 스스럼 없이 쓰는 속담 중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또한 돌 하나하나를 서로 상관없는 제각각의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 이롭게 쓰이는 돌 중에 모가 없는 돌이 어디 있던가? 내 가족의 고향인 제주도의 돌담들은 그 모진 바람에도 서로의 모를 맞대고 묵묵히 세월을 이겨내고 있지 않던가?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 또한 어찌 돌의 모가 없이 그 어마어마한 규모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을 것인가?

나는 김진태 의원의 촛불 발언,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표현은 이 땅의 주인들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사이의 끈끈한 연대를 폄훼하고 해체하려는 고약한 시도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왜 모가 나면 안된단 말인가? 나의 모와 너의 모가 서로 어깨를 맞대고 기댈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큰 가치들을 거뜬히 짊어질 수 있지 않은가? 그러한 우리의 모를 정으로 내리치고 기어이 깎아 내려는 시도를 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이며, 거센 민심의 들불을 연약한 촛불의 군집으로 애써 평가절하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속담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구글링을 해 보니, 이 속담이 일본의 것으로 소개된 저서를 본 트위터 사용자가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한 내용이 있는데, 국립국어원에서도 그 기원을 알기 어렵다고 답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분노의 질주> 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Fast & Furious> 시리즈 중 <도쿄 드리프트(Tokyo Draft)> 편에서 일본의 오랜 속담 중에 “튀어나온 못이 정을 맞는다(The nail that sticks out gets hammered).” 라는 표현이 있다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이 속담이 동북아 전체에 널리 통용되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또는 군부독재정권이 시민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이 몹쓸 속담이 한 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문장에 담긴 의도와 우리 사회에서의 쓰임새로 미루어보더라도 충분히 합리적인 추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수락연설을 통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변명으로 점철된 우리의 비겁한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는 사자후를 토한 바 있다. 나는 김진태 의원의 발언을 듣고 이 연설을 다시 떠올렸다. 하여, 나는 이렇게 말한다. “둥근 돌로 쌓은 담은 허물어진다.”고. “바람이 거세게 불수록 들불 또한 더욱 거세어 진다.” 고.


스시와 비즈니스

미슐랭 3스타에 빛나는 최고의 스시 셰프, 오노 지로(小野 二郎) 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Jiro Dream of Sushi> 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소개된다. 진행자가 지로 상에게 “셰프가 밥(샤리, 舎利)과 생선 등 재료(네타, )를 말아쥐는 퍼포먼스가 스시 전체의 공정 중에서 과대평가되는 것은 아닙니까?” 라고 다분히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의외로 지로 상이 환하게 웃으며 “흠… 일리있는 말입니다. 사실 스시의 90%는 이미 내가 손에 쥐기 전에 완성된 상태로 준비되지요.” 라고 답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스시는 한 마디로 음식의 생태계 전체가 하나로 응축된 메타포어 그 자체이다. 지로 상과 같은 최고의 쇼쿠닌(人) 이 빚어내는 극상의 맛은 천의무봉의 경지에 이른 스시 쥐는 솜씨는 물론이거니와 최고의 재료공급상들과 수십년에 걸쳐 쌓아온 돈독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로 상에게 쌀을 공급하는 생산자는 일본 최고의 특급호텔들의 러브콜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쌀을 줘 봐야 호텔의 요리사들이 지로 상만큼 그 쌀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익의 흐름으로 연결된 공급망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일 수 있으나 이처럼 확고한 신뢰에 기반한 파트너십은 환경의 변화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으며, 바로 그 이유 덕분에 지로 상과 같은 셰프가 수십년에 걸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관계로 똘똘 뭉친 곳이 바로 긴자(座) 상권과 츠키지(地) 시장이다. 츠키지에 모인 최고의 재료공급상들은 매일 아침 긴자에서 손수 재료를 구입하러 오는 최고의 셰프들을 만난다. 최고의 투자자들과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교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담이지만, 서울에서 본인의 이름을 걸고 스시야를 운영 중인 일본인 셰프에게 어떤 손님이 “도쿄 출장길에 긴자에 가려고 하는데 맛있는 음식점을 추천해 주세요.” 라고 했더니 그 셰프가 “긴자에서는 어딜 가든 기본적으로 맛있습니다.” 라고 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긴자에 있는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수련한 요리사가 독립을 할 때에는 스승이 있는 긴자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출발하게 되고, 경륜과 평판을 쌓아감에 따라 점점 긴자에 가깝게 매장을 이전해 가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에 긴자에 입성한 것 자체가 하나의 보증수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긴자의 턱 밑에 츠키지 시장이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비즈니스에 있어 구매자, 즉 돈을 지불하는 측이 우월적 지위 – 한국식 표현으로 ‘갑(甲)’ – 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은 기실 교환의 매개이자 가치산정의 척도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지불한 기업이나 개인은 반대급부로 그에 상응하는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지불한 금액 이상의 가치와 효용을 누릴 수도 있다. 또한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현명하게 소비하면 공급자는 구매자를 존중하게 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장기적인 신뢰를 제공할 수도 있다. 특급호텔의 자본력으로도 뚫을 수 없는 지로상과 쌀 생산자 사이의 신뢰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 신뢰의 가치를 모르고서 ‘내가 돈을 지불하니 내가 곧 왕이다’ 라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비즈니스에 있어 극히 근시안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그 효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구매에 있어 이러한 근시안적 행태는 가히 치명적이다. 100 을 주고 50 의 효용 밖에 얻지 못할 수도 있고, 150을 주고 300의 효용을 얻을 수도 있다. 쌀을 어떻게 다뤄야 제대로 밥맛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싸게 샀다고 좋아해 본들 무슨 소용일까?

최고의 스시가 신뢰와 존중이라는 비옥한 토양을 갖춘 생태계에서 비롯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비즈니스의 원리도 스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최고의 결과물을 내고자 한다면 생산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기본이다. ‘돈을 주고 산다’ 라는 개념 대신 ‘가치를 교환한다’ 라는 인식, ‘가성비’라는 영악한 표현 대신 ‘제 값을 치뤘다’ 는 공정한 만족감이 우리나라의 산업 전반에도 널리 확산되었으면 한다. 오마카세 스시 한 끼를 먹든, 대규모의 부품이나 솔루션을 구매하든 그 본질은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프로듀스 101과 한국형 알파고

 

순위사회.

나는 작금의 대한민국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양성의 가치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획일적인 잣대로 줄을 세우는 문화. 사람들이 가장 즐겨보는 온라인 컨텐츠 중 하나가 소위 ‘실급검’, 즉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라는 것인데 내가 필요한 것을 잘 찾아주면 그 뿐일 검색서비스를 통해 남들이 무엇을 찾아보는지 순위까지 매겨가며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심리에 기인한 것일까? YouTube 를 위시한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이나 Spotify 같은 온라인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만 하더라도 개인의 취향에 최적화된 추천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운영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차트와 서비스 제공자의 획일적인 큐레이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순위, 그리고 그 순위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묵시적인 불안감. 굳이 잔혹하기 그지 없는 입시 경쟁까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점입가경의 한 단면은 매스미디어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최근 큰 화제와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 의 포맷을 보면 그야말로 이러한 ‘순위사회’의 축소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101명의 연습생들이 등장하는 그 스케일만으로도 아연실색하게 되는데, 이렇게 많은 연습생들이 가진 다양한 재능들에 순위를 매기고 줄을 세워 탈락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적자생존의 이 포맷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며, ‘pick me’ 를 외치는 연습생들에게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아가 투영되었기 때문에 높은 인기를 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씁쓸한 기운마저 든다.

한편, 지난 3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지능정보사회 민관합동 간담회> 에서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지능정보산업 발전 전략’ 을 통해 우리나라의 AI 산업을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관련 기사). 이 발표에서도 순위사회의 한 단면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언어지능을 비롯한 총 5개의 분야에서 2019~2020년까지 세계 1위에 오르거나 시연에 성공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용수 미래창조과학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은 이 목표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왜 이것을 하느냐면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답을 한 바 있고(관련 기사), 정책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본다. 하지만, AI 처럼 도전적인 과제는 그에 걸맞는 문제정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단언컨대 ‘살아남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1등을 하기 위해’ 라는 동기는 ‘인류가 당면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동기에 비한다면 미약하기 그지 없는 수준의 것이다.

지난 해, Google 의 Head of Innovation 을 맡고 있는 Frederik R. Pferdt 가 서울디지털포럼(관련 동영상) 참석 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 기업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때 Frederik 은 그 기업의 임원들에게 Google 의 사명(Mission)인 ‘organize the world’s information and make it universally accessible and useful’ 를 소개하면서 ‘지속적으로 추구 가능한 사명을 세우고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그 사명을 실천할 때 그 기업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반면, ‘세계 1위’, ‘시장점유율 1위’ 와 같은 목표는 언젠가 달성 가능한 하나의 성과측정기준일 뿐이며 이런 것들은 결코 구성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없다는 견해 또한 피력한 바 있다. 나 역시 이러한 목표는 고객중심적이지도 않고 목적지향적이지도 않다는 점에서 그저 경영자들의 근시안적 이해관계를 위해 기업의 자원을 결집하기 위한 생경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앞선 포스팅 – 구글의 리더쉽 – 에서 Google 의 CEO 인 Sundar Pitchai 와 DeepMind 의 CEO 인 Demis Hassabis 는 CNN 공동기고문(원문 보기)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음을 소개한 바 있다.

현재 세계가 마주한 도전과제는 ‘인간’ 대 ‘기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도구’ 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다. 기후변화, 의료 보건, 교육 등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슈들이 있고, 수천 명의 전문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들은 이러한 전문가들에게 강력한 문제 해결 도구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긴급한 글로벌 이슈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머신러닝을 활용하여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 또 한 명의 위대한 기업가인 Tesla 의 Elon Musk 는 Tesla 의 배터리인 Powerwall 을 발표하는 프리젠테이션(관련 동영상)의 첫 장을 화석연료가 환경에 미치는 해악을 경고하는 데 할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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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on Musk 는 이 Powerwall 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세계 1위의 배터리 업체가 되겠다’ 와 같은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인류를 둘러싼 심각한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Tesla 가 가진 기술을 통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의 공감을 유도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접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과학자들 중 과연 누가 ‘세계 1등이 되겠다’ 는 목표와 동기에 의해 움직였던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정의하고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평생을 다 바쳤을 때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우리 사회는 이처럼 단순명료한 진리를 놓친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1등을 하기 위해 장미빛 청사진을 그리고 ‘pick me’ 를 외친다.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 있어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이다. 알파고가 보여주었듯 최적의 의사결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어쩌면 기계와 AI의 몫이 될지도 모른다. 101명의 연습생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인기를 끌 수 있을지 분석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은 단언컨대 그 어떤 전문가보다 기계가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못 믿겠다고? 이것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New York Times 에서는 2013년 <Solving Equation of a Hit Film Script, With Data> 라는 기사(원문 링크)를 통해 데이터에 기반한 대본분석가들이 흥행을 위해 가감해야 할 요소들을 조언해 주고 있음을 소개한 바 있다. 이것조차 와 닿지 않는다면 Brad Pitt 주연의 영화 혹은 책 <Money ball> 을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한편, 우리를 둘러싼 문제를 정의하고 어떤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를 설계하는 능력은 여전히 그리고 고스란히 우리들 사피엔스의 몫이다. 국가의 백년지대계 과학정책이든, 기업이 사업을 영위하는 일이든, 차세대 스타를 발굴하는 일이든, 우리가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 올바르게 정의하는 일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해 졌다. 올바른 문제정의는 구성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의 도구들을 목적적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프로듀스 101 에서 유추할 수 있는 순위사회의 토대 위에 한국형 알파고가 꽃을 피우기 요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글의 리더쉽

알파고와 이세돌9단의 역사적인 대국이 모두 끝난 후, 세간의 관심은 ‘Google’ 이라는 회사에 집중되었다. 내일이면 필자가 구글에 합류한지 정확히 3년이 되는데, 그동안 구글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은 적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딜 가나 이 회사에 대한 설왕설래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많은 분들께서 구글의 앞선 기술과 그로 인한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럴수록 이 놀라운 회사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써 자세를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대국은 필자에게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 역시 구글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 혹은 사피엔스로서 기술의 진보가 가져 올 미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난 번 포스팅 – 알파고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을 통해 혁신적인 기업과 기업가들이 선의를 잃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이번 포스팅을 통해서는 현 시점에서 가장 큰 기술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업 중 하나인 구글의 구성원으로서 구글의 리더쉽에 여전한 기대와 신뢰를 견지하는 개인적인 이유들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단, 내부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자세히 공유할 수 없음은 독자 여러분들께 널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먼저 이번 대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많은 언론들이 이번 대국의 프레임을 ‘인간 vs 기계’ 로 정의하고, 알파고의 승리를 인간에 대한 위협, 특히 대규모 실업을 초래할 수 있는 실체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한 우려가 전혀 근거없거나 혹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구글의 엔지니어들, 특히 리더들의 시각과는 적지않은 간극이 있음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구글의 CEO 인 Sundar Pitchai 와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의 CEO 인 Demis Hassabis 는 CNN 에 공동기고한 글(원문 보기)을 통해 이번 대국을 ‘인간 vs 기계’ 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 그렇다면, 알파고의 승리가 곧 인간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가? 인간의 독창적 전략을 필요로 하는 대표적인 게임인 바둑에서조차 컴퓨터가 인간을 이긴다면 그것이 결국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현재 세계가 마주한 도전과제는 ‘인간’ 대 ‘기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도구’ 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다. 기후변화, 의료 보건, 교육 등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슈들이 있고, 수천 명의 전문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들은 이러한 전문가들에게 강력한 문제 해결 도구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긴급한 글로벌 이슈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머신러닝을 활용하여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이 점점 스마트해지고 다재다능해짐에 따라, 우리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글로벌 도전과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는 생각을 이제 버려야 한다. 이제 더 큰 목표를 세워야 한다.”

내가 구글의 두 창업자를 비롯한 리더들에 대해 갖고 있는 첫번째 확신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 에 대한 열망과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구글의 인사담당 부사장인 Laszlo Bock 이 쓴 <Google work rules(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 를 보면 Larry Page 와 Sergey Brin 의 성장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Larry 의 할아버지는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였다. Larry 는 할아버지가 연좌 파업을 하는 동안 회사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고 직접 만들어 갖고 다니셨던 커다란 쇠파이프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회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고 무기를 만들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은 얼마나 많이 좋아졌으며, 리더로서 자신이 할 일은 모든 구글러들이 각자 가치있는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피력한 바 있다. 한편 Sergey 의 부모는 두 분 모두 수학자였는데, 1979년에 자식의 미래와 자유를 위해 반(反) 유대주의 공산정권인 소련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바 있고, Sergey 는 자신의 반골 기질이 이러한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창업자들을 마냥 찬양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들이 자신의 성장배경과 과거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번 대국 기간 중 내한한 Eric Schmidt 회장이나 딥마인드의 Demis Hassabis 또한 머신러닝과 AI 를 통해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이 이세돌9단에게 거둔 네 번의 승리 못지 않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한 번의 패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 한 가지 구글의 리더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미덕은 ‘겸양(Humility)’ 이다. 이번 대국이 끝나고 이세돌 9단과 양손으로 허리 숙여 인사한 Sergey 의 사진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셨는데, 구글에서 생각하는 겸양의 개념은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Thomas Friedman 이 Laszlo Bock 부사장과의 인터뷰에 대해 New York Times 에 기고한 <How to get a job at Google?(원문 보기)>에 따르면 Laszlo 부사장은 겸양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책임감과 주인의식의 문제이다.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인의식을 갖고 앞으로 나서야 하지만, 동료의 더 나은 아이디어를 포용하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겸양의 미덕이다. 당신의 최종 목표는 결국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내 몫의 기여를 했다면 동료들의 아이디어를 위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겪은 구글의 리더들의 화법과 행동에서도 이런 겸양의 미덕을 확인할 수 있다. 구글의 리더들은 언제나 “What can I do for you?” 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근자에 구글 입사 후 가장 고위직 – 사실 이 표현도 구글에서는 좀체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 에 계신 분께 미팅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브리핑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도 그 분께서는 “내가 오늘 미팅 중에 너에게 어떤 도움을 주면 될까?” 라고 대화를 시작하셨고 그 미팅을 위해 내가 준비한 것의 200% 를 발휘해 주셨다. 직급을 막론하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이야말로 리더로서 실무진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Obama 대통령이 군사작전 중에 현장지휘관 옆에 놓인 접이식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진을 보았을 때와 거의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동료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자세에 더하여 Lazlo 부사장은 ‘지적 겸양(Intellectual Humility)’이라는 개념을 추가하고 있다. 지식 앞에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구글이 인재를 채용함에 있어 학벌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겸양에 있어서 또한 구글의 리더들은 훌륭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구글에서는 내부 교육의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이러한 교육에 강제로 참석할 것을 종용받아 본 적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이런 교육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리더들이라는 점이다. 구글에서 리더는 몰라도 되는 사소한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이라면 자발적으로 그것을 체득해야 하고 그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높은 직급의 구글러라 하더라도 겸손한 자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할진대, 구글의 창업자이자 세계 14위의 부호인 Sergey Brin 이 이세돌9단에게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악수를 한들 놀랄 일이 무엇이겠는가? Sergey 에게 이세돌9단은 지적인 겸양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지성일테니 말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열정, 그리고 동료와 지식 앞에서의 겸손함. 내가 구글에서 3년동안 일하면서 생생히 느껴 온 구글 리더십의 한 단면이다. 물론 구글도 완벽한 회사는 아니며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업자에서부터 대한민국 서울의 세일즈맨인 나에게 이르기까지 이러한 정신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구글이라는 회사의 큰 영향력을 감안할 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글을 바라보는 모든 분들께서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실 수는 없겠지만 이 글을 통해 구글의 리더십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편린이나마 공유할 수 있다면 이 글을 쓰는 수고로움이 헛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알파고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딥마인드의 알파고와 이세돌9단의 대국 1, 2차전이 세간의 예상(혹은 기대)과 달리 알파고의 두 차례 불계승으로 끝나자, 사람들은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인공지능이 초래할 변화에 대한 불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현대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전 인류가 사실상 하루하루 혁명적인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보니 어지간한 기술적 진보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인공지능’ 이라고 하는 기술만큼은 우리 모두가 걱정어린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SF영화에서 그려진 암울한 미래를 떠올리며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 것이나, 그 불안의 장막을 걷어내고 나아갈 길을 터주어야 할 의무를 지닌 지식인과 언론들 조차 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큰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알파고는 기계가 인류에게 보내는 선전포고일까?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기계에 종속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한 채 암울한 삶을 영위하게 될까? 나는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알파고와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앞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느끼는 이 충격과 공포가 어디에 뿌리를 내린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해 보고, 알파고와 인공지능을 어떤 자세로 마주해야 할 지 추스르는 일이다.

알파고, 혹은 알파고의 승리에 대해 충격을 넘어선 적개심을 드러내는 분들도 많이 계셨고, 이런 분들의 반응은 19세기 초, 방직기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운동이었던 ‘러다이트(Luddite)’ 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러다이트 시대와 같이 지금 당장 인공지능으로 인한 대규모의 실업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자동화는 필연적으로 일자리 공급을 줄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많은 분들이 우려를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과거의 자동화가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위협을 가져다 주었다면,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은 지금까지 자동화의 사각지대에 있던 전문사무직 노동자, 즉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으로 하여금 미래의 일자리에 대한 우려를 갖게 한다. 이미 간단한 사무자동화는 일상이 되었지만 그동안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전략적 의사결정’ 또한 기계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되었다는 것을 알파고가 보여줌으로써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들로 하여금 큰 우려를 불어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내 주변 반응만으로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일이나,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내 친척분들에게는 알파고의 승리가 그저 흥미로운 가쉽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서울에서 전문적인 영역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에게는 이것이 실재하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의 우려가 과연 알파고를 비롯한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에만 기인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new normal’ 로 규정되는 작금의 경제상황 하에서 이미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은 취약한 구조에 내 몰리고 있다. (그 밖의 계층이 안전하는 뜻은 절대 아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던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마저 이제는 안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썼음을 분명히 한다.)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선망하는 전문직, 혹은 대기업 종사자들끼리 주고 받는 카카오톡의 그룹메세지 속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특정 기업의 구조조정 계획들이 공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해고와 임금피크제를 노조의 동의없이 시행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연금제도 등 노후를 보장할 사회안전망은 불안하기 그지 없고 개인적으로 미래를 대비하기엔 주택, 육아, 교육 등에 당장 지출해야 할 비용이 너무나 크다. 이러한 경제상황 하에서 나타난 알파고의 존재는 마치 도화선과도 같이 사람들의 우려에 불을 붙였고 이로 인해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논의의 기회는 애초부터 상실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국에 있어 이세돌9단에게 한국사회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면 알파고에게는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위협들을 뭉뚱그려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이분법이 이번 대국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염려스럽다.

실업에 대한 위협보다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충격의 근원은 ‘무지에 대한 거부 반응’ 이다. 이번 대국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설은 그야말로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19*19 에 이르는 바둑판 위에 펼쳐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 수 보다도 많다고 하면서도 정작 알파고가 두는 수에 대해서는 ‘충격적이다’ 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 수 보다도 많은 경우의 수 속에서 그동안 인간이 두어 온 한 줌 모래와도 같은 수들을 놓고 ‘정석’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닐까?  인간 전문가들이 파악해 온 그야말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한 채로 이 대국을 받아들인다면 매 순간이 충격의 연속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둑의 세계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광대한 것이라면 도대체 놀랄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지점에서 나심 탈렙의 ‘검은 백조(black swan)’ 과 얼마 전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의 ‘반서재(anti-library)’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검은 백조(black swan)’. 얼핏 모순형용 같지만, 실제로 검은 백조는 존재한다. 그런데 조류학자들은 왜 ‘백조’ 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검은색의 백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것, 다시 말해 무지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나타났을 때 감내하기 어려운 큰 충격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그 복잡도가 극도로 높아진 현대 사회에 있어 변화와 충격을 초래하는 것은 대부분 이 ‘검은 백조’ 현상들이라는 점이다. 월가의 현자들 중 몇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예측했으며, 그 누가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대비하자는 주장을 실행에 옮겼는지 생각해 보면 그 답은 자명하다.

알파고는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무지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완벽하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최근작 <사피엔스> 에서 서양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제국으로서의 주도권을 쥐게 된 요인 중 하나로 ‘무지에 대한 인정’ 을 꼽은 바 있다. 대항해 시대 당시 유럽에서 발행된 세계지도에는 공백으로 남겨진 부분이 많았고 이것은 곧 유럽인들이 미지의 대륙에 대한 존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에 반해 중국과 동양의 지도는 중화사상을 반영한 완전무결한 형태로 그려져 있고 신대륙을 위한 공간 따위는 남겨져 있지 않다. 딥마인드 팀에게는 이세돌9단을 비롯한 인간계 초고수들이 두어온 바둑, 그 여백이 엄청나게 크게 보일 것이고, 알파고의 한 수 한 수에 충격을 받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세돌9단의 바둑이 전부인 양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나는 바로 그것이 동일한 현상에 대한 양극단의 반응을 설명하는 단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알파고와 인공지능에 대한 충격과 공포의 근원을 짚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해 볼 차례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숙제이지만,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 즉 사피엔스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대해서는 나 역시 유발 하라리의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다만 조선일보에서 유발 하라리와의 인터뷰 헤드라인을 “2100년이면 현생 인류 사라질 것… 알파고가 그 신호탄” 라고 쓴 것을 보았는데(기사보기), 이것은 유발 하라리의 견해를 곡해하기에 딱 좋은 표현이다. 유발 하라리는 결코 현생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현생 인류, 즉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사피엔스가 기술의 발전에 힙입어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피엔스는 장기 및 신체기관 이식, 증강현실 등에 힘입어 지금에 비해 훨씬 더 큰 능력을 가진 존재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망은 본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트위터를 가리켜 ‘외뇌(外腦)’ 라고 표현한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이미 사피엔스는 인터넷과 각종 도구들에 힘입어 과거 우리의 조상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알파고의 등장에 우려를 표하는 고임금 화이트컬러 계층들이 많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는데, 이미 그 계층들은 상당 부분 인터넷을 비롯한 기술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확률과 통계에 대한 책 한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에 대해 논할 수가 있었겠는가?) 다만 앞으로는 이러한 도구들과 사피엔스의 결합이 한층 더 강화되고 그 활용도 또한 높아짐으로써 새로운 단계, 다시 말해 ‘진화’라 부를 만한 단계로 진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처럼 다가 올 미래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큰 폭의 변화를 수반하리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런 만큼 이에 대한 대비 또한 범국가적, 아니 전지구적인 협력에 기초해야 한다. 만일 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간이 육체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혜택은 모든 인간들에게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특정기업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이윤을 나누지 않고 독점한다면 기술의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한 형태의 독점은 결국 공멸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 시대의 현자들, 특히 혁신적인 기업가들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Google 의 두 창업자가 창업 후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Don’t be evil.’ 을 강조하는 것은 단지 이것이 미사여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곧 플랫폼 기업, 어쩌면 모든 기업의 생존법칙이라는 것을 뼛 속까지 이해하고 있는 덕분이다. 결국 세상이 선의로 작동할 수 있다는 믿음은 – 비록 나는 애덤 스미스를 배운 경제학도이지만 –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신념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나 역시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세돌9단과 알파고 간의 세 번 째 대국이 진행 중이다. 나는 알파고의 3:2 우세를 예상했고, 알파고가 첫 대국을 이긴다면 5:0 승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오늘 대국은 이세돌9단의 승리를 바란다. 이세돌9단이 나와 같은 사피엔스라서가 아니라, 이세돌9단이 나의 무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가득찬 흥미로운 곳임을 깨닫게 해 주길 바란다. 이세돌9단의 건승을 빈다.

 

 

 


바르셀로나 미식기행

“‘We believe terroir matters’ 는 단순한 브랜드 슬로건이 아니다. ‘Terroir’ 는 그 지역 고유의 감각을 의미한다. 그것은 토양, 지층, 공기, 기후 등이 식물의 생육과 주고 받는 모든 영향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서 우리가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과정에 깊이 스며있다. ‘Terroir’ 로 말미암아 어느 지역의 위스키든 그 곳만의 독특한 풍미를 머금게 되는 것이다.” – Bruichladdich homepage 에서 발췌 후 의역

와인이나 위스키의 애호가라면 무릇 이 ‘Terroir’ 라는 단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원재료 – 와인은 포도, 위스키는 보리 – 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양조법으로 만들어지지만 각각의 술들이 미묘한 맛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어느 지역에서 빚고 숙성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Islay 위스키의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Bruichladdich 양조장이 내세운 ‘We believe terroir matters’ 라는 슬로건은 음식을 만들고 즐기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신념이 아닐 수 없다.

‘Terroir’ 가 음식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면 이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 맛을 즐겨보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접근이다. 세계적인 권위의 미슐랭 가이드가 최고 등급인 별 세 개의 의미를 ‘그 맛을 즐기기 위해 그 레스토랑이 있는 지역으로 여행할 가치가 있는(worth a journey)’ 것으로 기술한 것도 어쩌면 이 ‘Terroir’ 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세계인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풍광을 품고 있는 지중해 연안은 ‘Terroir’ 와 음식의 하모니를 음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중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2016년 2월 하순, 일주일동안 출장을 위해 머물렀던 바르셀로나, 즉 까딸루냐의 맛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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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바르셀로나를 주도로 하는 까딸루냐 지방은 스페인의 북동부 지역으로 북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두고 프랑스와 마주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지역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분리주의 성향이 강하며 어느 곳을 가던 스페인 국기 대신 까딸루냐 주기가 테라스에 걸려 있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강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의 강한 개성은 살바도르 달리, 안토니오 가우디, 파블로 카잘스와 같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한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에 있어서도 창의적인 기운을 가득 불어넣고 있으니, 그 상징이 바로 전설적인 레스토랑 ‘엘불리(El Bulli)’ 이다.

‘엘불리’ 는 더 이상 수식어가 필요없는 그야말로 최고의 레스토랑이자 21세기의 파인 다이닝, 분자요리의 개척자적 존재이며, 2011년 스스로 문을 닫음으로써 그야말로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엘불리’ 에 대한 설명은 사족이 될 것 같아 더 하지 않겠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엘불리’ 출신 요리사들이 그들의 본거지인 까딸루냐 지방에서 각기 흥미로운 시도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Paypal’ 창업자 출신의 기업가들이 ‘Paypal Mafia’ 로 불리우며 실리콘 밸리에 혁신의 기운을 계속 불어넣고 있는 것처럼 이들 또한 ‘El Bulli Mafia’ 로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1. Niño Viejo : 인간계로 내려온 신계의 셰프들이 만든 Tex-Mex cooking 의 진수

필자가 직접 가본 적도 없는, 그리고 앞으로 가볼 수도 없는 ‘엘불리’ 로 까딸루냐의 음식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이번 여정에서 이 ‘엘불리’와 간접적으로 조우하는 즐거운 우연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맨하탄에 살고 있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인 박 모 군 – 맨하탄의 트렌드를 꿰뚫고 있는 대단한 미식가이지만 결국 흰쌀밥과 젓갈 한 점에 쓰러지는 천상 한국사람이다 – 이 귀뜸해 준 ‘Niño Viejo’ 라는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엘불리’의 형제 셰프 중 동생인 Albert Adria 를 우연히 만나 잠시 대화를 주고 받았던 즐거운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 ‘Niño Viejo’의 셰프 또한 ‘엘불리’ 출신의 Paco Méndez 로써 Albert Adria 는 옛 동료에게 조언을 하기 위해 이 레스토랑을 수시로 들린다고 했다. (Albert Adria 스스로 이 레스토랑에 직접 관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Tickets’ 라고 하는 타파스 바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쉽고 특별할 것 없는 길거리 음식 정도로 생각했던 타코 한 접시를 놓고 세계 최고 수준의 두 셰프가 세심하게 완성도를 점검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Niño Viejo’의 환상적인 Catalan-Mex>

 ‘Niño Viejo’ 의 음식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신 맛과 매콤한 맛의 환상적인 조화’ 라고 할 수 있다. 가볍고 경쾌한 질감의 마가리따가 새콤한 맛으로 침샘을 예열해 준 다음, 주 재료 위에 얹혀진 섬세한 배합의 멕시칸 소스들이 혀 위에서 플라멩꼬를 춘다고 한다면 과한 수사일까?  물론 주 재료인 해산물, 육류의 선도와 맛 또한 기존에 갖고 있던 멕시칸 푸드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날려버릴 수준이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타코를 둘러싸고 있는 또르띠야의 향과 질감이었다. 각각의 또르띠야는 속 재료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이 제공되었는데 밀과 옥수수가 제각각의 존재감을 확실히 뿜어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질감 또한 입 안에서 속 재료와 어우러지기에 가장 알맞은 정도의 찰기를 머금고 있었다.

 One more thing. 만약 이 집에서 타코를 제외하고 나에게 최고의 음식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문어 세비체(Ceviche de pulpo con recado rojo)’ 를 꼽겠다. 평소에도 문어숙회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로서는 라임의 산미가 문어의 질감을 최적의 상태로 끌어올린 이 집의 세비체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위에 더해진 붉은 소스와 고수의 향 또한 이 접시를 그동안 내가 맛 본 문어 중 최고로 꼽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Niño Viejo’ 바로 옆에 ‘Hoja Santa’ 라는 레스토랑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New York Time 의 Style Magazine 인 ‘T Magazine‘ 에 실린 Albert Adria 의 코멘트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The Mexican kitchen is brilliant in its regional diversity and the way it creates complex layers of taste and contrasting textures. So I wanted to rescue its reputation from the blight of the Tex-Mex cooking that’s better known in Europe by creating a pair of restaurants that showcase how good it is: Niño Viejo, a traditional good-times taquería that serves street food and the kind of casual cooking found in urban Mexico, and the other, Hoja Santa, a place that would offer a modern take on Mexican cooking.”

 미각의 설계를 극한까지 실험했던 ‘엘불리’의 두 셰프는 그들이 체득한 경험을 멕시칸 음식의 구조에 적용해 보기로 마음을 먹은 셈이다. 그 한 편에서는 보다 전통적인 방식의 ‘Niño Viejo’ 로, 다른 한 편에서는 보다 모던한 방식의 ‘Hoja Santa’ 를 통해서 여러 겹의 맛과 다양한 질감의 비교라는 멕시칸 음식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는 그들의 혁신적인 시도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2. La Cervecería Catalana :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 비범한 맛

‘Niño Viejo’가 탑 클래스 셰프들의 의도된 시도라고 한다면,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일상 속에 켜켜이 녹아 든 음식을 맛 보기에 ‘La Cervecería Catalana’ 가 제 격이지 않을까 싶다. 묵었던 호텔 근처에 이 타파스 바가 있었던 덕분에 아침 산책길에 여유롭게 들릴 수 있었지만 사실 저녁 시간대에는 자리잡기가 여간 어려운 집이 아니라고 한다. (붐비는 시간대까지 알려주는 Google Search 는 낯선 여행지에서 더욱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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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Google Search>

<‘La Cervecería Catalana’ 의 Tapas. 평범해 보이지만 그 맛은 실로 비범하다.>

지중해 연안 지역 대부분에서 올리브오일, 마늘, 그리고 토마토는 빠질 수 없는 식재료들이다. 까딸루냐 지방의 음식은 그 중에서도 특히 원재료의 맛이 강조되는데 ‘La Cervecería Catalana’ 에서도 그러한 특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집 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 어느 레스토랑에서든 맛볼 수 있었던, 바게뜨 위에 생마늘을 문지르고 그 위에 토마토를 직접 짜 올려 먹는 방식은 ‘왜 한국에서도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간단하면서도 살아있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Cabreaos Egg Style 은 아주 얇고 바삭하게 튀긴 감자에 매콤한 토마토 소스를 얹은 다음 그 위에 달걀 노른자를 버무려 먹는, 제법 간단한 레시피의 음식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감자튀김만 사다가 타바스코소스, 케첩, 그리고 달걀 노른자를 이용해서 간단히 해 먹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아직까지 시도해 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더 촉촉한 느낌의 감자(Bravas)는 이 지역의 대표 소스인 ‘알 이 올리(All i Oli)’ – ‘알리오 올리오(aglio e olio)’ 와 비슷한 발음에서 눈치챘겠지만, 마늘과 올리브오일의 조합으로 만든 소스이다. 마늘을 절구에 갈면서 올리브오일을 조금씩 첨가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이 지역 고유의 방식이다 – 와 멋지게 어울렸고, 구운 고추와 곁들여 먹은 돼지등심구이는 한국에서 주로 먹던 기름진 삼겹살과는 전혀 다른 풍미로 나를 즐겁게 하였다. 끝으로, 아침식사 치고는 너무 과하다 싶어 그만 먹으려다 언제 또 오겠나 싶어 주문한, 크루와상에 부드러운 하몽을 채운 Flauta – Flauta 는 사전적으로 바게뜨처럼 기다란 모양의 빵이라는 뜻인데, 이러한 빵에다 햄이나 치즈 등을 채워먹는 음식을 통칭하는 듯 하다 – 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어디까지가 빵이고 어디까지가 하몽인지 모를 정도로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식감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3. La Boqueria & Can Majo : 우리가 알던 까딸루냐의 맛, 하지만 조금은 다른.

 La Boqueria 는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으로 다양한 식재료들을 구경하고 맛보기 좋은 곳이다. 시장 내에 있는 ‘El Quim De La Boqueria’ 라는 음식점의 ‘달걀에 버무린 꼴뚜기(huevos con chipirones)’ 가 하도 유명해서 이 곳부터 찾았는데 호기롭게도 장기휴가로 문을 닫아버린 터라 Pinotxo Bar 라는 음식점에서 카딸루냐 시장의 맛을 경험하게 되었다.

염장대구는 대서양 연안 국가를 가면 꼭 맛보는 음식 중의 하나인데, La Boqueria 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그 맛 또한 훌륭했다. 포르투에서 맛 본 것보다는 염장이 조금 덜한 느낌에 올리브오일을 곁들여 그 풍미가 남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쏙’이라고 부르는 딱새우와 비슷한 것을 고온의 팬 위에 얹고 그 위에 뚜껑을 덮여 쪄내는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이 품고 있는 염기와 어우러져 간단한 레시피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하였고, 스패니쉬 오믈렛과 소시지 또한 투박하면서도 촉촉한 질감에 지역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위 사진 중 마지막 두 개는 La Boqueria 가 아니라 Barceloneta 라고 하는 해변 지역의 Can Majo 레스토랑에서 맛 본 음식이다. 왼쪽의 것은 해삼을 버섯과 함께 조리한 다음 올리브오일을 곁들인 것인데, 껍질을 벗긴 해삼의 풍미와 질감이 버섯의 그것과 매우 흡사해서 훌륭한 조합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흔히 즐기던 한식이나 중식 해삼과는 전혀 다른 맛에 흥미로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중해의 갖가지 해산물들을 넉넉하게 담아 낱알이 굵은 발렌시아 쌀과 함께 조리한 파에야의 맛은 점잖으면서도 친절했던 웨이터에게 ‘Muy Bien(Very Good)’ 을 외칠만큼 즐거운 맛을 선사해 주었다.

#4. ABaC : Catalan Cuisine 의 정수. 까딸루냐의 전통 위에 피어난 Jordi Cruz 의 천재성.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까딸루냐 지방은 굳이 ‘엘불리’ 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파인 다이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역이다. 미슐랭을 포함하여 파인 다이닝의 기준이 유럽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재료와 지역성을 바탕으로 천재적인 요리사들이 맹활약하는 지역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번 출장 중에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해 두고 간 레스토랑은 ABaC 과 Manairó 두 곳이었는데, 각각 미슐랭 투스타와 원스타를 획득하고 있는 세계적인 명성의 레스토랑들이었다. 특히 ABaC 의 Head Chef 인 Jordi Cruz 는 바르셀로나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써 그의 나이 26에 미슐랭 스타를 획득하면서 역대 두번째로 어린 나이에 미슐랭에 이름을 올린, 그야말로 천재 셰프라고 할 수 있다.

서울로 치면 한남동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아뭏든 붐비는 도심에서는 약간 벗어난 지역에 자리한 ABaC 은 작은 규모의 호텔과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인터폰을 누르고 나서 내부로 안내받은 다음, 두 종류의 코스 메뉴 중 풀코스에 해당하는 Gran ABaC 을 선택하였다. 가장 먼저 식전주가 서빙되었는데 채도가 낮은 노란색의 음료가 온더락스로 나와 이게 뭔가 했더니 다름 아닌 ‘블러디 메리(Bloody Mary)’ 였다. 웨이터에게 설명을 부탁하니 하룻밤동안 블러디 메리를 가라앉혀 층을 나눈 다음 붉은 부분을 덜어낸 것이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단맛이 덜하고 기분좋은 신맛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 식전주로서의 역할을 극대화 하기 위한 선택이 아닌가 싶었다. 참고로 동행했던 나의 선배님은 이 블러디 메리 맛에 반해 식사 내내 여러 잔을 드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뒤이어 캐비어가 곁들여진 작은 조개가 입 안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듯 하더니 매우 특이한 플레이팅의 음식이 등장했다. ‘Pizzeta’ 라는 이름으로 보아 ‘작은 피자’ 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은데, 매우 얇고 크리스피한 웨이퍼 위에 말린 성게소(우니), 플랑크톤 버터, 그리고 말린 토마토를 얹은 독창적인 음식이었다. 이 음식은 감칠맛을 더해주는 오징어 수프를 담은 작은 그릇 위에 얹혀 나와 시각적인 즐거움마저 더해주었다.

이어서 조금씩 간이 더해진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플레이팅만 봐서는 일본이나 중국요리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구운 장어가 들어간 중국식 빵이었다. 사진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너도밤나무 연기를 살짝 입힌 다음 와사비를 곁들여 먹으니 주 재료의 묵직함이 훈연향을 거쳐 와사비의 상큼함으로 마무리되는 컨텍스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 까딸루냐의 소울푸드라고 할 수 있는 ‘칼솟타다(Calçotada)’ – 한국식으로 말하면, ‘대파 직화구이’ 쯤 되겠다 – 를 재해석한 메뉴가 등장했다. 전통방식의 칼솟타다와 말려서 크리스피하게 만든 칼솟타다, 그리고 구운 흑마늘을 이 지역 고유의 소스인 Romesco – 이 또한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쌈장’ 비슷하다 – 에 곁들여 먹었는데, ABaC 에 들리기 전에 운 좋게도 지역 고유의 칼솟타다를 미리 맛볼 수 있었던 덕분에 이 음식이 얼마나 창의적인 것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뒤이어 Scamorza 라고 하는, 마치 조랭이떡 같이 생긴 미니 모짜렐라가 띄워진 양파 수프가 속을 파낸 양파 속에 담겨 나와 입 안 가득 기분좋은 단맛을 선사해 주었다.

잠시 입 안이 묵직해 지려던 찰나 온도를 서로 달리한 새우와 오징어 요리가 상큼한 소스와 함께 나와 입안을 가볍게 해 주었다. 특히 새우의 머릿 속 내장은 지금까지 맛 본 갑각류의 그것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할 만큼 비리거나 잡스러운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훌륭한 맛이었다. 이어서 말린 소고기를 즉석에서 끓여 만든 콘소메를 말린 햄과 콜라겐에 곁들어 낸 음식으로 코스 전체의 일관성을 유지해 나갔다. 이 다음에 나온 음식은 겉모양만 봐서는 그냥 달걀프라이인가 싶었으나 흰자부분의 질감이 예사롭지 않아 웨이터에게 그 재료를 물어보았더니 파마산 치즈와 달걀, 그리고 놀랍게도 ‘rooster crest’, 다시 말해 닭의 벼슬이 들어갔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닭벼슬은 동서양 모두에서 식재료로 쓰인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메인에 해당하는 음식들이 등장하였다. 가장 먼저 나온 광어요리는 도저히 내 부족한 어휘와 문장으로는 그 맛을 묘사할 수가 없을만큼 전혀 새롭고 미묘한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가지, 요오드, 그리고 생선 지느러미를 끓인 액으로 만든 소스가 광어살과 글레이즈드된 껍질에 어우러지는 맛은 이것을 설계하고 만든 요리사의 노력과 천재성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뒤이어 나온 세 가지 맛의 양 혓바닥 요리, 그리고 즉석에서 버섯으로 훈증한 푸아그라를 잎에 말아 먹는 오리고기 또한 맛이라고 하기보단 난생 처음 해 보는 진귀한 경험 그 자체였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네 종류의 유쾌한 디저트들이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마치 잔디밭 같은 느낌을 주는 허브 웨이퍼 아래 담긴 시트론 향의 아이스크림과 Kefir – 요거트와 유사한 발효식품의 일종 – 였는데, 그 앞에 맛본 모든 음식들의 맛을 단번에 잊게 해 줄 정도의 산뜻함을 자랑하였다. 이어서 이 지역이 분자요리의 메카라는 것을 일깨워 주듯 즉석에서 중탕한 초콜릿 티, 그리고 같은 초컬릿을 액체질소로 냉각한 아이스크림을 연달아 맛보게 해 주었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며 긴장을 늦추고 입안에 넣었던 디저트마저 토닉 버블이 레몬, 망고와 함께 입안에서 톡톡 터지면서 피날레 불꽃과도 같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단맛을 즐기지 않아 많은 경우 디저트를 건너뛰는 편인 나에게 ABaC 의 디저트는 그냥 지나쳤더라면 매우 아까웠을, 흡족한 경험이었다.

미슐랭 투스타에 빛나는 지역 최고의 레스토랑에 흠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섬세한 미각의 소유자도 아니거니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칭찬을 아낄 수 없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훌륭한 레스토랑이라면 응당 그러하듯 지역의 재료와 정서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이 ABaC 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 이 곳의 독특한 매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블러디 메리로 시작해서 오징어 수프, 양파 수프, 비프 콘소메 등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입 안을 적셔주는 요소들이 요리들 사이의 간극을 채워주는 동시에 재료 본연의 맛을 충분히 느끼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가벼운 가격은 아니지만 다른 도시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비한다면 충분히 합리적인 편이고, 가격을 떠나서라도 이 지역을 방문한다면 꼭 맛보기를 권할 만한 레스토랑이다. 또한 Jordi Cruz 역시 엘불리의 셰프들과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 도심에서 ‘Ten’s‘ 라고 하는 타파스 바를 운영한다고 하니 이 집을 찾아보는 것도 분명 큰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5. Calçotada : 까딸루냐의 거친 토양에 뿌리내린 맛. 까딸란들의 소울 푸드.

끝으로 이 지역사람들이 즐겨 먹는 ‘칼솟타다(Calçotada)’ 를 언급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우연한 기회에 지역분들이 직접 해 드시는 것을 옆에서 조금 맛보게 되었는데 그 단순하면서도 깊은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이 음식은 대파와 유사한 ‘칼솟(Calçot)’ – 대파라고 하기엔 맵고 아린 맛이 훨씬 덜하다 – 을 숯불에 겉이 탈만큼 구운 다음, 탄 부분만 벗겨내어 Romesco 소스에 찍어먹는 음식이다. (최근 요리프로그램에서 요리사들이 파프리카를 가스불에 직화로 굽고 나서 탄 부분을 벗겨내면 단맛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와 비슷한 원리라고 보면 되겠다.) 파의 진액이 응축되어 단맛을 넉넉히 느낄 수 있고 숯의 향이 더해져 그 풍미가 독특하고 매력있을 뿐 아니라, 매콤한 Romesco 소스의 맛 또한 한국 사람의 입맛에 크게 낯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까딸루냐 지방은 그 지층이 거칠어 이 지역의 와인 산지인 Priorat 의 포도나무들은 무려 10~15m 정도 그 뿌리를 내린다고 하는데, 풍요로운 해산물들이 이 지역의 바다에서 비롯된 것인 반면, 칼솟타다는 까딸루냐의 질박한 토양을 은유하는 음식으로 느껴졌다. 문득 나는 내 고향 부산에서 풍요로운 해산물 못지 않게 유명한 동래파전 또한 금정산 자락에 지천으로 널린 잔파로 만든 것임을 상기하게 되었다. 까딸루냐 사람들에게 All i Oli 소스를 더한 동래파전의 맛을 보여주면 매우 흥미로워 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출장 중에 운이 좋게도 아침 저녁으로 현지의 맛을 고루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굳이 한식을 고집하지 않았던 나의 선배님과 모바일로 예약이 수월했던 스페인의 인프라, 그리고 내 지인들의 추천 덕분이었다. 십 수 년만에 다시 찾은 바르셀로나에 대한 경험의 폭과 깊이가 더해질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큰 축복이고 행운이었다. 비록 일주일 남짓한 경험으로 이 지역의 맛을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겠으나 까딸루냐의 Terroir  를 조금이나 맡을 수 있는 글이 된다면 그로써 만족할 따름이다.


움베르토 에코를 기리며

Mobile World Congress 2016 참석 차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2월 19일.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는 스페인어 – 어쩌면 까딸루냐어였을지 모를 –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페인어 초급 강좌만 두 어 번 들었던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기에 ‘아, 바르셀로나에 잘 도착했구나’ 하는 신호 정도로 흘려 듣던 찰나, 문득 ‘움베르토 에코’ 라는 선명한 이름이 귀를 울렸다. 잠시 후 검색을 통해 확인한 것은 안타깝게도 그의 부고였다.

당대의 기호학자이자 세계적인 작가였던 그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제기했던 ‘반서재(Antilibrary)’ 의 개념은 나심 니콜 탈렙이 주창한 ‘안티프래질(Antifragile)’ 과 함께 지식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책, 다시 말해 지식을 마치 지키고 아껴야 할 자산처럼 여기는 태도를 180도 뒤집어 그 여집합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무지의 가능성을 열어두게끔 하는 그의 시각은 단순명료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유용한 개념이라면 응당 그러하듯.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유럽이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아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움베르토 에코가 읽었다면 박수를 쳤을 법한 해석을 내 놓았다. 15,6 세기 동양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는 비어있는 미지의 지역이 없었던 반면, 동시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역에 대한 공백이 분명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유럽인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지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유럽이 위험을 감수하고 대양을 건널 수 있었던 근원적인 동기라는 유발 하라리의 지적에 나 또한 깊이 공감하고 있다. 도도한 역사가 이러할진대 한낱 개인의 삶에 있어서 무지에 대한 자각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런지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로 출장와 있는 동안, 그 대륙의 반대편 동쪽 끝에 있는 한반도의 내 나라에서는 ‘테러방지법’ 이라는 이름의 위세도 당당한 법 앞에 야당의원들이 장시간 릴레이 토론으로 맞서는 소위 ‘필리버스터’ 가 펼쳐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이것은 정말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 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에 나는 묻고 싶다. 대통령의 단호한 지적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대통령의 서재는 빈 칸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빽빽하고 대단한 것인가? 설령 오랜 경륜으로 그 빈틈이 극히 좁다할지라도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자라면 의심과 회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숙명 아니던가? 나는 대통령의 분노 앞에 참담했다.

일주일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문물을 접하고, 제주에서 천 년을 버텨온 내 조상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국의 땅을 밟으면서 내 서재가 채워지는 것을 경계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이것을 다행히 여기는 것조차 경계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움베르토 에코는 반서재의 개념을 설파했지만 정작 그 개념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소중한 지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국회를 보라. 반서재 개념의 현신들이 웅변을 토하고 있지 않은가? 움베르토 에코의 명복을 빈다. 그대의 반서재에 영면하시길.

 


[사피엔스] 7만년의 connecting dots.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 Steve Jobs

미래를 내다보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의미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뒤돌아 보았을 때 지나온 순간들이 어떤 의미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며, 따라서 굳은 신념과 믿음을 갖고 전진하라는 스티브 잡스의 조언은 인생을 살아가면 갈수록 더욱 절실히 와닿는 가르침이다. 개인의 삶이 그러할진대 인류의 역사, 더 나아가 생명의 역사, 우주의 역사 또한 중요한 순간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나름의 맥락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이처럼 담대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구하고자 하는 시도를 우리는 ‘빅히스토리(Big History)’ 라고 부른다. (‘빅히스토리(Big History)’ 에 대해서는 데이빗 크리스찬(David Christian) 의 TED speech 를 추천한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빅히스토리’ 의 연대기를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인류학’으로 구분 – 이것은 당연한 구분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고(물리학의 시작), 원자와 분자가 생겨났으며(화학의 시작), 생명체가 등장하고(생물학의 시작), 그 말미에 인류가 번성(인류학의 시작)했기 때문이다. – 하고, 그 중에서도 인류학, 특히 지금으로부터 약 7만년 전, 사피엔스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 지구로 번성하기 시작한 이후의 역사로 Zoom-in 해 들어갔다. 이 7만년의 ‘connecting dots’ 가 바로 그의 역작 <사피엔스(Sapiens)> 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대담하고 도발적이다. 제목부터 ‘인류(Mankind)’ 대신 ‘사피엔스(Sapiens)’ 라는 생물학상 종의 명칭을 내세움으로써 인류를 여타의 생물들과 다른 반열에 놓으려는 선입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기존의 인류학, 역사학들이 형성해 놓은 이 종에 대한 신화(myth)들을 과학의 힘을 빌어 냉철하게 도려내고 있다. 어쭙잖은 비유일지 모르나, 마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를 썼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느낌마저 든다. 또한 7만년의 긴 여정을 다루지만 핵심적인 dots 들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저자의 필치는 Zoom-in, Zoom-out 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초고성능 렌즈와 같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역작’ 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이유다.

 저자가 7만년을 약 600 페이지에 압축한 것을 조금 더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2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Homo) 속이 진화한 이후, 수많은 종들이 지구상에 나타났다. 20만년 전, 호모 속에 속한 수많은 종들 중에서 동아프리카에 출현한 사피엔스 종은 7만년 전, 언어를 사용하는 인지혁명을 통해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약 1만2천년 전에 진행된 농업혁명은 개체의 행복과는 무관하게 사피엔스 종의 번성을 빠르게 하였고, 이 종이 언어를 통해 창조해 낸 상상력의 산물인 돈, 제국, 종교는 널리 확산된 종의 통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피엔스가 전 지구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종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약 5백년전부터 우리는 가히 ‘과학혁명’ 이라 불릴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는 우리에게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다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아니 ‘사피엔스’ 라는 종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위와 같은 요약을 본 혹자는 ‘이것이 우리가 알던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그동안 우리 스스로, 즉 ‘인류’ 를 그 밖의 생명체들과 전혀 차별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던 근거없는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단지 하나의 종, ‘사피엔스’ 로서 어떻게 진화하고 번성해 왔는지를 냉정하게 되짚어 보는 데 있다. 바로 이렇게 생물학과 인류학(또는 역사학) 을 넘나들며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전제들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제국’의 본질에 대한 고찰,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 등을 다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오롯이 과학과 합리적 추론의 힘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책을 읽는 내내 지적인 흥분을 가라 앉히기 힘들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인류의 역사가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와 자존감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책을 통해 접한 사피엔스의 역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라는 개체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섬뜩하리만치 냉정하게 보여준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류의 진보라는 것의 실체가 개체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흐름이 아니었음을, 많은 우연이 개입되었지만 인류의 번성 또한 ‘사피엔스’ 라는 한 종의 번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그리고 마침내 이 ‘사피엔스’ 라는 종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깨달음으로써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된다. 먼 우주를 돌고 돌아 결국 집으로 되돌아 오게 되는 <인터스텔라> 의 여정과도 같은 책이다. 자신있게 일독을 권해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