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딥마인드의 알파고와 이세돌9단의 대국 1, 2차전이 세간의 예상(혹은 기대)과 달리 알파고의 두 차례 불계승으로 끝나자, 사람들은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인공지능이 초래할 변화에 대한 불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현대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전 인류가 사실상 하루하루 혁명적인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보니 어지간한 기술적 진보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인공지능’ 이라고 하는 기술만큼은 우리 모두가 걱정어린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SF영화에서 그려진 암울한 미래를 떠올리며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 것이나, 그 불안의 장막을 걷어내고 나아갈 길을 터주어야 할 의무를 지닌 지식인과 언론들 조차 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큰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알파고는 기계가 인류에게 보내는 선전포고일까?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기계에 종속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한 채 암울한 삶을 영위하게 될까? 나는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알파고와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앞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느끼는 이 충격과 공포가 어디에 뿌리를 내린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해 보고, 알파고와 인공지능을 어떤 자세로 마주해야 할 지 추스르는 일이다.

알파고, 혹은 알파고의 승리에 대해 충격을 넘어선 적개심을 드러내는 분들도 많이 계셨고, 이런 분들의 반응은 19세기 초, 방직기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운동이었던 ‘러다이트(Luddite)’ 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러다이트 시대와 같이 지금 당장 인공지능으로 인한 대규모의 실업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자동화는 필연적으로 일자리 공급을 줄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많은 분들이 우려를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과거의 자동화가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위협을 가져다 주었다면,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은 지금까지 자동화의 사각지대에 있던 전문사무직 노동자, 즉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으로 하여금 미래의 일자리에 대한 우려를 갖게 한다. 이미 간단한 사무자동화는 일상이 되었지만 그동안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전략적 의사결정’ 또한 기계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되었다는 것을 알파고가 보여줌으로써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들로 하여금 큰 우려를 불어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내 주변 반응만으로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일이나,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내 친척분들에게는 알파고의 승리가 그저 흥미로운 가쉽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서울에서 전문적인 영역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에게는 이것이 실재하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의 우려가 과연 알파고를 비롯한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에만 기인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new normal’ 로 규정되는 작금의 경제상황 하에서 이미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은 취약한 구조에 내 몰리고 있다. (그 밖의 계층이 안전하는 뜻은 절대 아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던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마저 이제는 안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썼음을 분명히 한다.)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선망하는 전문직, 혹은 대기업 종사자들끼리 주고 받는 카카오톡의 그룹메세지 속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특정 기업의 구조조정 계획들이 공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해고와 임금피크제를 노조의 동의없이 시행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연금제도 등 노후를 보장할 사회안전망은 불안하기 그지 없고 개인적으로 미래를 대비하기엔 주택, 육아, 교육 등에 당장 지출해야 할 비용이 너무나 크다. 이러한 경제상황 하에서 나타난 알파고의 존재는 마치 도화선과도 같이 사람들의 우려에 불을 붙였고 이로 인해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논의의 기회는 애초부터 상실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국에 있어 이세돌9단에게 한국사회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면 알파고에게는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위협들을 뭉뚱그려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이분법이 이번 대국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염려스럽다.

실업에 대한 위협보다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충격의 근원은 ‘무지에 대한 거부 반응’ 이다. 이번 대국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설은 그야말로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19*19 에 이르는 바둑판 위에 펼쳐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 수 보다도 많다고 하면서도 정작 알파고가 두는 수에 대해서는 ‘충격적이다’ 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 수 보다도 많은 경우의 수 속에서 그동안 인간이 두어 온 한 줌 모래와도 같은 수들을 놓고 ‘정석’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닐까?  인간 전문가들이 파악해 온 그야말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한 채로 이 대국을 받아들인다면 매 순간이 충격의 연속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둑의 세계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광대한 것이라면 도대체 놀랄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지점에서 나심 탈렙의 ‘검은 백조(black swan)’ 과 얼마 전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의 ‘반서재(anti-library)’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검은 백조(black swan)’. 얼핏 모순형용 같지만, 실제로 검은 백조는 존재한다. 그런데 조류학자들은 왜 ‘백조’ 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검은색의 백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것, 다시 말해 무지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나타났을 때 감내하기 어려운 큰 충격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그 복잡도가 극도로 높아진 현대 사회에 있어 변화와 충격을 초래하는 것은 대부분 이 ‘검은 백조’ 현상들이라는 점이다. 월가의 현자들 중 몇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예측했으며, 그 누가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대비하자는 주장을 실행에 옮겼는지 생각해 보면 그 답은 자명하다.

알파고는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무지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완벽하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최근작 <사피엔스> 에서 서양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제국으로서의 주도권을 쥐게 된 요인 중 하나로 ‘무지에 대한 인정’ 을 꼽은 바 있다. 대항해 시대 당시 유럽에서 발행된 세계지도에는 공백으로 남겨진 부분이 많았고 이것은 곧 유럽인들이 미지의 대륙에 대한 존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에 반해 중국과 동양의 지도는 중화사상을 반영한 완전무결한 형태로 그려져 있고 신대륙을 위한 공간 따위는 남겨져 있지 않다. 딥마인드 팀에게는 이세돌9단을 비롯한 인간계 초고수들이 두어온 바둑, 그 여백이 엄청나게 크게 보일 것이고, 알파고의 한 수 한 수에 충격을 받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세돌9단의 바둑이 전부인 양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나는 바로 그것이 동일한 현상에 대한 양극단의 반응을 설명하는 단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알파고와 인공지능에 대한 충격과 공포의 근원을 짚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해 볼 차례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숙제이지만,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 즉 사피엔스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대해서는 나 역시 유발 하라리의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다만 조선일보에서 유발 하라리와의 인터뷰 헤드라인을 “2100년이면 현생 인류 사라질 것… 알파고가 그 신호탄” 라고 쓴 것을 보았는데(기사보기), 이것은 유발 하라리의 견해를 곡해하기에 딱 좋은 표현이다. 유발 하라리는 결코 현생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현생 인류, 즉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사피엔스가 기술의 발전에 힙입어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피엔스는 장기 및 신체기관 이식, 증강현실 등에 힘입어 지금에 비해 훨씬 더 큰 능력을 가진 존재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망은 본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트위터를 가리켜 ‘외뇌(外腦)’ 라고 표현한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이미 사피엔스는 인터넷과 각종 도구들에 힘입어 과거 우리의 조상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알파고의 등장에 우려를 표하는 고임금 화이트컬러 계층들이 많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는데, 이미 그 계층들은 상당 부분 인터넷을 비롯한 기술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확률과 통계에 대한 책 한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에 대해 논할 수가 있었겠는가?) 다만 앞으로는 이러한 도구들과 사피엔스의 결합이 한층 더 강화되고 그 활용도 또한 높아짐으로써 새로운 단계, 다시 말해 ‘진화’라 부를 만한 단계로 진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처럼 다가 올 미래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큰 폭의 변화를 수반하리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런 만큼 이에 대한 대비 또한 범국가적, 아니 전지구적인 협력에 기초해야 한다. 만일 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간이 육체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혜택은 모든 인간들에게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특정기업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이윤을 나누지 않고 독점한다면 기술의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한 형태의 독점은 결국 공멸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 시대의 현자들, 특히 혁신적인 기업가들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Google 의 두 창업자가 창업 후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Don’t be evil.’ 을 강조하는 것은 단지 이것이 미사여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곧 플랫폼 기업, 어쩌면 모든 기업의 생존법칙이라는 것을 뼛 속까지 이해하고 있는 덕분이다. 결국 세상이 선의로 작동할 수 있다는 믿음은 – 비록 나는 애덤 스미스를 배운 경제학도이지만 –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신념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나 역시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세돌9단과 알파고 간의 세 번 째 대국이 진행 중이다. 나는 알파고의 3:2 우세를 예상했고, 알파고가 첫 대국을 이긴다면 5:0 승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오늘 대국은 이세돌9단의 승리를 바란다. 이세돌9단이 나와 같은 사피엔스라서가 아니라, 이세돌9단이 나의 무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가득찬 흥미로운 곳임을 깨닫게 해 주길 바란다. 이세돌9단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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