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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미식기행

“‘We believe terroir matters’ 는 단순한 브랜드 슬로건이 아니다. ‘Terroir’ 는 그 지역 고유의 감각을 의미한다. 그것은 토양, 지층, 공기, 기후 등이 식물의 생육과 주고 받는 모든 영향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서 우리가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과정에 깊이 스며있다. ‘Terroir’ 로 말미암아 어느 지역의 위스키든 그 곳만의 독특한 풍미를 머금게 되는 것이다.” – Bruichladdich homepage 에서 발췌 후 의역

와인이나 위스키의 애호가라면 무릇 이 ‘Terroir’ 라는 단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원재료 – 와인은 포도, 위스키는 보리 – 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양조법으로 만들어지지만 각각의 술들이 미묘한 맛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어느 지역에서 빚고 숙성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Islay 위스키의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Bruichladdich 양조장이 내세운 ‘We believe terroir matters’ 라는 슬로건은 음식을 만들고 즐기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신념이 아닐 수 없다.

‘Terroir’ 가 음식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면 이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 맛을 즐겨보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접근이다. 세계적인 권위의 미슐랭 가이드가 최고 등급인 별 세 개의 의미를 ‘그 맛을 즐기기 위해 그 레스토랑이 있는 지역으로 여행할 가치가 있는(worth a journey)’ 것으로 기술한 것도 어쩌면 이 ‘Terroir’ 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세계인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풍광을 품고 있는 지중해 연안은 ‘Terroir’ 와 음식의 하모니를 음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중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2016년 2월 하순, 일주일동안 출장을 위해 머물렀던 바르셀로나, 즉 까딸루냐의 맛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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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바르셀로나를 주도로 하는 까딸루냐 지방은 스페인의 북동부 지역으로 북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두고 프랑스와 마주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지역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분리주의 성향이 강하며 어느 곳을 가던 스페인 국기 대신 까딸루냐 주기가 테라스에 걸려 있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강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의 강한 개성은 살바도르 달리, 안토니오 가우디, 파블로 카잘스와 같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한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에 있어서도 창의적인 기운을 가득 불어넣고 있으니, 그 상징이 바로 전설적인 레스토랑 ‘엘불리(El Bulli)’ 이다.

‘엘불리’ 는 더 이상 수식어가 필요없는 그야말로 최고의 레스토랑이자 21세기의 파인 다이닝, 분자요리의 개척자적 존재이며, 2011년 스스로 문을 닫음으로써 그야말로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엘불리’ 에 대한 설명은 사족이 될 것 같아 더 하지 않겠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엘불리’ 출신 요리사들이 그들의 본거지인 까딸루냐 지방에서 각기 흥미로운 시도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Paypal’ 창업자 출신의 기업가들이 ‘Paypal Mafia’ 로 불리우며 실리콘 밸리에 혁신의 기운을 계속 불어넣고 있는 것처럼 이들 또한 ‘El Bulli Mafia’ 로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1. Niño Viejo : 인간계로 내려온 신계의 셰프들이 만든 Tex-Mex cooking 의 진수

필자가 직접 가본 적도 없는, 그리고 앞으로 가볼 수도 없는 ‘엘불리’ 로 까딸루냐의 음식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이번 여정에서 이 ‘엘불리’와 간접적으로 조우하는 즐거운 우연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맨하탄에 살고 있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인 박 모 군 – 맨하탄의 트렌드를 꿰뚫고 있는 대단한 미식가이지만 결국 흰쌀밥과 젓갈 한 점에 쓰러지는 천상 한국사람이다 – 이 귀뜸해 준 ‘Niño Viejo’ 라는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엘불리’의 형제 셰프 중 동생인 Albert Adria 를 우연히 만나 잠시 대화를 주고 받았던 즐거운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 ‘Niño Viejo’의 셰프 또한 ‘엘불리’ 출신의 Paco Méndez 로써 Albert Adria 는 옛 동료에게 조언을 하기 위해 이 레스토랑을 수시로 들린다고 했다. (Albert Adria 스스로 이 레스토랑에 직접 관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Tickets’ 라고 하는 타파스 바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쉽고 특별할 것 없는 길거리 음식 정도로 생각했던 타코 한 접시를 놓고 세계 최고 수준의 두 셰프가 세심하게 완성도를 점검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Niño Viejo’의 환상적인 Catalan-Mex>

 ‘Niño Viejo’ 의 음식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신 맛과 매콤한 맛의 환상적인 조화’ 라고 할 수 있다. 가볍고 경쾌한 질감의 마가리따가 새콤한 맛으로 침샘을 예열해 준 다음, 주 재료 위에 얹혀진 섬세한 배합의 멕시칸 소스들이 혀 위에서 플라멩꼬를 춘다고 한다면 과한 수사일까?  물론 주 재료인 해산물, 육류의 선도와 맛 또한 기존에 갖고 있던 멕시칸 푸드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날려버릴 수준이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타코를 둘러싸고 있는 또르띠야의 향과 질감이었다. 각각의 또르띠야는 속 재료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이 제공되었는데 밀과 옥수수가 제각각의 존재감을 확실히 뿜어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질감 또한 입 안에서 속 재료와 어우러지기에 가장 알맞은 정도의 찰기를 머금고 있었다.

 One more thing. 만약 이 집에서 타코를 제외하고 나에게 최고의 음식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문어 세비체(Ceviche de pulpo con recado rojo)’ 를 꼽겠다. 평소에도 문어숙회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로서는 라임의 산미가 문어의 질감을 최적의 상태로 끌어올린 이 집의 세비체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위에 더해진 붉은 소스와 고수의 향 또한 이 접시를 그동안 내가 맛 본 문어 중 최고로 꼽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Niño Viejo’ 바로 옆에 ‘Hoja Santa’ 라는 레스토랑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New York Time 의 Style Magazine 인 ‘T Magazine‘ 에 실린 Albert Adria 의 코멘트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The Mexican kitchen is brilliant in its regional diversity and the way it creates complex layers of taste and contrasting textures. So I wanted to rescue its reputation from the blight of the Tex-Mex cooking that’s better known in Europe by creating a pair of restaurants that showcase how good it is: Niño Viejo, a traditional good-times taquería that serves street food and the kind of casual cooking found in urban Mexico, and the other, Hoja Santa, a place that would offer a modern take on Mexican cooking.”

 미각의 설계를 극한까지 실험했던 ‘엘불리’의 두 셰프는 그들이 체득한 경험을 멕시칸 음식의 구조에 적용해 보기로 마음을 먹은 셈이다. 그 한 편에서는 보다 전통적인 방식의 ‘Niño Viejo’ 로, 다른 한 편에서는 보다 모던한 방식의 ‘Hoja Santa’ 를 통해서 여러 겹의 맛과 다양한 질감의 비교라는 멕시칸 음식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는 그들의 혁신적인 시도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2. La Cervecería Catalana :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 비범한 맛

‘Niño Viejo’가 탑 클래스 셰프들의 의도된 시도라고 한다면,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일상 속에 켜켜이 녹아 든 음식을 맛 보기에 ‘La Cervecería Catalana’ 가 제 격이지 않을까 싶다. 묵었던 호텔 근처에 이 타파스 바가 있었던 덕분에 아침 산책길에 여유롭게 들릴 수 있었지만 사실 저녁 시간대에는 자리잡기가 여간 어려운 집이 아니라고 한다. (붐비는 시간대까지 알려주는 Google Search 는 낯선 여행지에서 더욱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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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Google Search>

<‘La Cervecería Catalana’ 의 Tapas. 평범해 보이지만 그 맛은 실로 비범하다.>

지중해 연안 지역 대부분에서 올리브오일, 마늘, 그리고 토마토는 빠질 수 없는 식재료들이다. 까딸루냐 지방의 음식은 그 중에서도 특히 원재료의 맛이 강조되는데 ‘La Cervecería Catalana’ 에서도 그러한 특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집 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 어느 레스토랑에서든 맛볼 수 있었던, 바게뜨 위에 생마늘을 문지르고 그 위에 토마토를 직접 짜 올려 먹는 방식은 ‘왜 한국에서도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간단하면서도 살아있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Cabreaos Egg Style 은 아주 얇고 바삭하게 튀긴 감자에 매콤한 토마토 소스를 얹은 다음 그 위에 달걀 노른자를 버무려 먹는, 제법 간단한 레시피의 음식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감자튀김만 사다가 타바스코소스, 케첩, 그리고 달걀 노른자를 이용해서 간단히 해 먹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아직까지 시도해 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더 촉촉한 느낌의 감자(Bravas)는 이 지역의 대표 소스인 ‘알 이 올리(All i Oli)’ – ‘알리오 올리오(aglio e olio)’ 와 비슷한 발음에서 눈치챘겠지만, 마늘과 올리브오일의 조합으로 만든 소스이다. 마늘을 절구에 갈면서 올리브오일을 조금씩 첨가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이 지역 고유의 방식이다 – 와 멋지게 어울렸고, 구운 고추와 곁들여 먹은 돼지등심구이는 한국에서 주로 먹던 기름진 삼겹살과는 전혀 다른 풍미로 나를 즐겁게 하였다. 끝으로, 아침식사 치고는 너무 과하다 싶어 그만 먹으려다 언제 또 오겠나 싶어 주문한, 크루와상에 부드러운 하몽을 채운 Flauta – Flauta 는 사전적으로 바게뜨처럼 기다란 모양의 빵이라는 뜻인데, 이러한 빵에다 햄이나 치즈 등을 채워먹는 음식을 통칭하는 듯 하다 – 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어디까지가 빵이고 어디까지가 하몽인지 모를 정도로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식감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3. La Boqueria & Can Majo : 우리가 알던 까딸루냐의 맛, 하지만 조금은 다른.

 La Boqueria 는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으로 다양한 식재료들을 구경하고 맛보기 좋은 곳이다. 시장 내에 있는 ‘El Quim De La Boqueria’ 라는 음식점의 ‘달걀에 버무린 꼴뚜기(huevos con chipirones)’ 가 하도 유명해서 이 곳부터 찾았는데 호기롭게도 장기휴가로 문을 닫아버린 터라 Pinotxo Bar 라는 음식점에서 카딸루냐 시장의 맛을 경험하게 되었다.

염장대구는 대서양 연안 국가를 가면 꼭 맛보는 음식 중의 하나인데, La Boqueria 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그 맛 또한 훌륭했다. 포르투에서 맛 본 것보다는 염장이 조금 덜한 느낌에 올리브오일을 곁들여 그 풍미가 남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쏙’이라고 부르는 딱새우와 비슷한 것을 고온의 팬 위에 얹고 그 위에 뚜껑을 덮여 쪄내는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이 품고 있는 염기와 어우러져 간단한 레시피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하였고, 스패니쉬 오믈렛과 소시지 또한 투박하면서도 촉촉한 질감에 지역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위 사진 중 마지막 두 개는 La Boqueria 가 아니라 Barceloneta 라고 하는 해변 지역의 Can Majo 레스토랑에서 맛 본 음식이다. 왼쪽의 것은 해삼을 버섯과 함께 조리한 다음 올리브오일을 곁들인 것인데, 껍질을 벗긴 해삼의 풍미와 질감이 버섯의 그것과 매우 흡사해서 훌륭한 조합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흔히 즐기던 한식이나 중식 해삼과는 전혀 다른 맛에 흥미로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중해의 갖가지 해산물들을 넉넉하게 담아 낱알이 굵은 발렌시아 쌀과 함께 조리한 파에야의 맛은 점잖으면서도 친절했던 웨이터에게 ‘Muy Bien(Very Good)’ 을 외칠만큼 즐거운 맛을 선사해 주었다.

#4. ABaC : Catalan Cuisine 의 정수. 까딸루냐의 전통 위에 피어난 Jordi Cruz 의 천재성.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까딸루냐 지방은 굳이 ‘엘불리’ 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파인 다이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역이다. 미슐랭을 포함하여 파인 다이닝의 기준이 유럽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재료와 지역성을 바탕으로 천재적인 요리사들이 맹활약하는 지역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번 출장 중에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해 두고 간 레스토랑은 ABaC 과 Manairó 두 곳이었는데, 각각 미슐랭 투스타와 원스타를 획득하고 있는 세계적인 명성의 레스토랑들이었다. 특히 ABaC 의 Head Chef 인 Jordi Cruz 는 바르셀로나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써 그의 나이 26에 미슐랭 스타를 획득하면서 역대 두번째로 어린 나이에 미슐랭에 이름을 올린, 그야말로 천재 셰프라고 할 수 있다.

서울로 치면 한남동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아뭏든 붐비는 도심에서는 약간 벗어난 지역에 자리한 ABaC 은 작은 규모의 호텔과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인터폰을 누르고 나서 내부로 안내받은 다음, 두 종류의 코스 메뉴 중 풀코스에 해당하는 Gran ABaC 을 선택하였다. 가장 먼저 식전주가 서빙되었는데 채도가 낮은 노란색의 음료가 온더락스로 나와 이게 뭔가 했더니 다름 아닌 ‘블러디 메리(Bloody Mary)’ 였다. 웨이터에게 설명을 부탁하니 하룻밤동안 블러디 메리를 가라앉혀 층을 나눈 다음 붉은 부분을 덜어낸 것이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단맛이 덜하고 기분좋은 신맛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 식전주로서의 역할을 극대화 하기 위한 선택이 아닌가 싶었다. 참고로 동행했던 나의 선배님은 이 블러디 메리 맛에 반해 식사 내내 여러 잔을 드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뒤이어 캐비어가 곁들여진 작은 조개가 입 안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듯 하더니 매우 특이한 플레이팅의 음식이 등장했다. ‘Pizzeta’ 라는 이름으로 보아 ‘작은 피자’ 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은데, 매우 얇고 크리스피한 웨이퍼 위에 말린 성게소(우니), 플랑크톤 버터, 그리고 말린 토마토를 얹은 독창적인 음식이었다. 이 음식은 감칠맛을 더해주는 오징어 수프를 담은 작은 그릇 위에 얹혀 나와 시각적인 즐거움마저 더해주었다.

이어서 조금씩 간이 더해진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플레이팅만 봐서는 일본이나 중국요리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구운 장어가 들어간 중국식 빵이었다. 사진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너도밤나무 연기를 살짝 입힌 다음 와사비를 곁들여 먹으니 주 재료의 묵직함이 훈연향을 거쳐 와사비의 상큼함으로 마무리되는 컨텍스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 까딸루냐의 소울푸드라고 할 수 있는 ‘칼솟타다(Calçotada)’ – 한국식으로 말하면, ‘대파 직화구이’ 쯤 되겠다 – 를 재해석한 메뉴가 등장했다. 전통방식의 칼솟타다와 말려서 크리스피하게 만든 칼솟타다, 그리고 구운 흑마늘을 이 지역 고유의 소스인 Romesco – 이 또한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쌈장’ 비슷하다 – 에 곁들여 먹었는데, ABaC 에 들리기 전에 운 좋게도 지역 고유의 칼솟타다를 미리 맛볼 수 있었던 덕분에 이 음식이 얼마나 창의적인 것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뒤이어 Scamorza 라고 하는, 마치 조랭이떡 같이 생긴 미니 모짜렐라가 띄워진 양파 수프가 속을 파낸 양파 속에 담겨 나와 입 안 가득 기분좋은 단맛을 선사해 주었다.

잠시 입 안이 묵직해 지려던 찰나 온도를 서로 달리한 새우와 오징어 요리가 상큼한 소스와 함께 나와 입안을 가볍게 해 주었다. 특히 새우의 머릿 속 내장은 지금까지 맛 본 갑각류의 그것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할 만큼 비리거나 잡스러운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훌륭한 맛이었다. 이어서 말린 소고기를 즉석에서 끓여 만든 콘소메를 말린 햄과 콜라겐에 곁들어 낸 음식으로 코스 전체의 일관성을 유지해 나갔다. 이 다음에 나온 음식은 겉모양만 봐서는 그냥 달걀프라이인가 싶었으나 흰자부분의 질감이 예사롭지 않아 웨이터에게 그 재료를 물어보았더니 파마산 치즈와 달걀, 그리고 놀랍게도 ‘rooster crest’, 다시 말해 닭의 벼슬이 들어갔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닭벼슬은 동서양 모두에서 식재료로 쓰인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메인에 해당하는 음식들이 등장하였다. 가장 먼저 나온 광어요리는 도저히 내 부족한 어휘와 문장으로는 그 맛을 묘사할 수가 없을만큼 전혀 새롭고 미묘한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가지, 요오드, 그리고 생선 지느러미를 끓인 액으로 만든 소스가 광어살과 글레이즈드된 껍질에 어우러지는 맛은 이것을 설계하고 만든 요리사의 노력과 천재성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뒤이어 나온 세 가지 맛의 양 혓바닥 요리, 그리고 즉석에서 버섯으로 훈증한 푸아그라를 잎에 말아 먹는 오리고기 또한 맛이라고 하기보단 난생 처음 해 보는 진귀한 경험 그 자체였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네 종류의 유쾌한 디저트들이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마치 잔디밭 같은 느낌을 주는 허브 웨이퍼 아래 담긴 시트론 향의 아이스크림과 Kefir – 요거트와 유사한 발효식품의 일종 – 였는데, 그 앞에 맛본 모든 음식들의 맛을 단번에 잊게 해 줄 정도의 산뜻함을 자랑하였다. 이어서 이 지역이 분자요리의 메카라는 것을 일깨워 주듯 즉석에서 중탕한 초콜릿 티, 그리고 같은 초컬릿을 액체질소로 냉각한 아이스크림을 연달아 맛보게 해 주었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며 긴장을 늦추고 입안에 넣었던 디저트마저 토닉 버블이 레몬, 망고와 함께 입안에서 톡톡 터지면서 피날레 불꽃과도 같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단맛을 즐기지 않아 많은 경우 디저트를 건너뛰는 편인 나에게 ABaC 의 디저트는 그냥 지나쳤더라면 매우 아까웠을, 흡족한 경험이었다.

미슐랭 투스타에 빛나는 지역 최고의 레스토랑에 흠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섬세한 미각의 소유자도 아니거니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칭찬을 아낄 수 없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훌륭한 레스토랑이라면 응당 그러하듯 지역의 재료와 정서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이 ABaC 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 이 곳의 독특한 매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블러디 메리로 시작해서 오징어 수프, 양파 수프, 비프 콘소메 등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입 안을 적셔주는 요소들이 요리들 사이의 간극을 채워주는 동시에 재료 본연의 맛을 충분히 느끼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가벼운 가격은 아니지만 다른 도시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비한다면 충분히 합리적인 편이고, 가격을 떠나서라도 이 지역을 방문한다면 꼭 맛보기를 권할 만한 레스토랑이다. 또한 Jordi Cruz 역시 엘불리의 셰프들과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 도심에서 ‘Ten’s‘ 라고 하는 타파스 바를 운영한다고 하니 이 집을 찾아보는 것도 분명 큰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5. Calçotada : 까딸루냐의 거친 토양에 뿌리내린 맛. 까딸란들의 소울 푸드.

끝으로 이 지역사람들이 즐겨 먹는 ‘칼솟타다(Calçotada)’ 를 언급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우연한 기회에 지역분들이 직접 해 드시는 것을 옆에서 조금 맛보게 되었는데 그 단순하면서도 깊은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이 음식은 대파와 유사한 ‘칼솟(Calçot)’ – 대파라고 하기엔 맵고 아린 맛이 훨씬 덜하다 – 을 숯불에 겉이 탈만큼 구운 다음, 탄 부분만 벗겨내어 Romesco 소스에 찍어먹는 음식이다. (최근 요리프로그램에서 요리사들이 파프리카를 가스불에 직화로 굽고 나서 탄 부분을 벗겨내면 단맛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와 비슷한 원리라고 보면 되겠다.) 파의 진액이 응축되어 단맛을 넉넉히 느낄 수 있고 숯의 향이 더해져 그 풍미가 독특하고 매력있을 뿐 아니라, 매콤한 Romesco 소스의 맛 또한 한국 사람의 입맛에 크게 낯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까딸루냐 지방은 그 지층이 거칠어 이 지역의 와인 산지인 Priorat 의 포도나무들은 무려 10~15m 정도 그 뿌리를 내린다고 하는데, 풍요로운 해산물들이 이 지역의 바다에서 비롯된 것인 반면, 칼솟타다는 까딸루냐의 질박한 토양을 은유하는 음식으로 느껴졌다. 문득 나는 내 고향 부산에서 풍요로운 해산물 못지 않게 유명한 동래파전 또한 금정산 자락에 지천으로 널린 잔파로 만든 것임을 상기하게 되었다. 까딸루냐 사람들에게 All i Oli 소스를 더한 동래파전의 맛을 보여주면 매우 흥미로워 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출장 중에 운이 좋게도 아침 저녁으로 현지의 맛을 고루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굳이 한식을 고집하지 않았던 나의 선배님과 모바일로 예약이 수월했던 스페인의 인프라, 그리고 내 지인들의 추천 덕분이었다. 십 수 년만에 다시 찾은 바르셀로나에 대한 경험의 폭과 깊이가 더해질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큰 축복이고 행운이었다. 비록 일주일 남짓한 경험으로 이 지역의 맛을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겠으나 까딸루냐의 Terroir  를 조금이나 맡을 수 있는 글이 된다면 그로써 만족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