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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를 기리며

Mobile World Congress 2016 참석 차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2월 19일.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는 스페인어 – 어쩌면 까딸루냐어였을지 모를 –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페인어 초급 강좌만 두 어 번 들었던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기에 ‘아, 바르셀로나에 잘 도착했구나’ 하는 신호 정도로 흘려 듣던 찰나, 문득 ‘움베르토 에코’ 라는 선명한 이름이 귀를 울렸다. 잠시 후 검색을 통해 확인한 것은 안타깝게도 그의 부고였다.

당대의 기호학자이자 세계적인 작가였던 그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제기했던 ‘반서재(Antilibrary)’ 의 개념은 나심 니콜 탈렙이 주창한 ‘안티프래질(Antifragile)’ 과 함께 지식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책, 다시 말해 지식을 마치 지키고 아껴야 할 자산처럼 여기는 태도를 180도 뒤집어 그 여집합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무지의 가능성을 열어두게끔 하는 그의 시각은 단순명료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유용한 개념이라면 응당 그러하듯.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유럽이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아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움베르토 에코가 읽었다면 박수를 쳤을 법한 해석을 내 놓았다. 15,6 세기 동양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는 비어있는 미지의 지역이 없었던 반면, 동시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역에 대한 공백이 분명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유럽인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지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유럽이 위험을 감수하고 대양을 건널 수 있었던 근원적인 동기라는 유발 하라리의 지적에 나 또한 깊이 공감하고 있다. 도도한 역사가 이러할진대 한낱 개인의 삶에 있어서 무지에 대한 자각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런지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로 출장와 있는 동안, 그 대륙의 반대편 동쪽 끝에 있는 한반도의 내 나라에서는 ‘테러방지법’ 이라는 이름의 위세도 당당한 법 앞에 야당의원들이 장시간 릴레이 토론으로 맞서는 소위 ‘필리버스터’ 가 펼쳐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이것은 정말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 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에 나는 묻고 싶다. 대통령의 단호한 지적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대통령의 서재는 빈 칸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빽빽하고 대단한 것인가? 설령 오랜 경륜으로 그 빈틈이 극히 좁다할지라도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자라면 의심과 회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숙명 아니던가? 나는 대통령의 분노 앞에 참담했다.

일주일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문물을 접하고, 제주에서 천 년을 버텨온 내 조상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국의 땅을 밟으면서 내 서재가 채워지는 것을 경계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이것을 다행히 여기는 것조차 경계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움베르토 에코는 반서재의 개념을 설파했지만 정작 그 개념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소중한 지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국회를 보라. 반서재 개념의 현신들이 웅변을 토하고 있지 않은가? 움베르토 에코의 명복을 빈다. 그대의 반서재에 영면하시길.

 


[사피엔스] 7만년의 connecting dots.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 Steve Jobs

미래를 내다보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의미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뒤돌아 보았을 때 지나온 순간들이 어떤 의미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며, 따라서 굳은 신념과 믿음을 갖고 전진하라는 스티브 잡스의 조언은 인생을 살아가면 갈수록 더욱 절실히 와닿는 가르침이다. 개인의 삶이 그러할진대 인류의 역사, 더 나아가 생명의 역사, 우주의 역사 또한 중요한 순간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나름의 맥락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이처럼 담대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구하고자 하는 시도를 우리는 ‘빅히스토리(Big History)’ 라고 부른다. (‘빅히스토리(Big History)’ 에 대해서는 데이빗 크리스찬(David Christian) 의 TED speech 를 추천한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빅히스토리’ 의 연대기를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인류학’으로 구분 – 이것은 당연한 구분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고(물리학의 시작), 원자와 분자가 생겨났으며(화학의 시작), 생명체가 등장하고(생물학의 시작), 그 말미에 인류가 번성(인류학의 시작)했기 때문이다. – 하고, 그 중에서도 인류학, 특히 지금으로부터 약 7만년 전, 사피엔스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 지구로 번성하기 시작한 이후의 역사로 Zoom-in 해 들어갔다. 이 7만년의 ‘connecting dots’ 가 바로 그의 역작 <사피엔스(Sapiens)> 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대담하고 도발적이다. 제목부터 ‘인류(Mankind)’ 대신 ‘사피엔스(Sapiens)’ 라는 생물학상 종의 명칭을 내세움으로써 인류를 여타의 생물들과 다른 반열에 놓으려는 선입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기존의 인류학, 역사학들이 형성해 놓은 이 종에 대한 신화(myth)들을 과학의 힘을 빌어 냉철하게 도려내고 있다. 어쭙잖은 비유일지 모르나, 마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를 썼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느낌마저 든다. 또한 7만년의 긴 여정을 다루지만 핵심적인 dots 들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저자의 필치는 Zoom-in, Zoom-out 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초고성능 렌즈와 같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역작’ 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이유다.

 저자가 7만년을 약 600 페이지에 압축한 것을 조금 더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2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Homo) 속이 진화한 이후, 수많은 종들이 지구상에 나타났다. 20만년 전, 호모 속에 속한 수많은 종들 중에서 동아프리카에 출현한 사피엔스 종은 7만년 전, 언어를 사용하는 인지혁명을 통해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약 1만2천년 전에 진행된 농업혁명은 개체의 행복과는 무관하게 사피엔스 종의 번성을 빠르게 하였고, 이 종이 언어를 통해 창조해 낸 상상력의 산물인 돈, 제국, 종교는 널리 확산된 종의 통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피엔스가 전 지구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종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약 5백년전부터 우리는 가히 ‘과학혁명’ 이라 불릴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는 우리에게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다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아니 ‘사피엔스’ 라는 종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위와 같은 요약을 본 혹자는 ‘이것이 우리가 알던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그동안 우리 스스로, 즉 ‘인류’ 를 그 밖의 생명체들과 전혀 차별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던 근거없는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단지 하나의 종, ‘사피엔스’ 로서 어떻게 진화하고 번성해 왔는지를 냉정하게 되짚어 보는 데 있다. 바로 이렇게 생물학과 인류학(또는 역사학) 을 넘나들며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전제들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제국’의 본질에 대한 고찰,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 등을 다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오롯이 과학과 합리적 추론의 힘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책을 읽는 내내 지적인 흥분을 가라 앉히기 힘들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인류의 역사가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와 자존감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책을 통해 접한 사피엔스의 역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라는 개체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섬뜩하리만치 냉정하게 보여준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류의 진보라는 것의 실체가 개체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흐름이 아니었음을, 많은 우연이 개입되었지만 인류의 번성 또한 ‘사피엔스’ 라는 한 종의 번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그리고 마침내 이 ‘사피엔스’ 라는 종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깨달음으로써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된다. 먼 우주를 돌고 돌아 결국 집으로 되돌아 오게 되는 <인터스텔라> 의 여정과도 같은 책이다. 자신있게 일독을 권해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