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 101과 한국형 알파고

 

순위사회.

나는 작금의 대한민국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양성의 가치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획일적인 잣대로 줄을 세우는 문화. 사람들이 가장 즐겨보는 온라인 컨텐츠 중 하나가 소위 ‘실급검’, 즉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라는 것인데 내가 필요한 것을 잘 찾아주면 그 뿐일 검색서비스를 통해 남들이 무엇을 찾아보는지 순위까지 매겨가며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심리에 기인한 것일까? YouTube 를 위시한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이나 Spotify 같은 온라인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만 하더라도 개인의 취향에 최적화된 추천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운영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차트와 서비스 제공자의 획일적인 큐레이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순위, 그리고 그 순위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묵시적인 불안감. 굳이 잔혹하기 그지 없는 입시 경쟁까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점입가경의 한 단면은 매스미디어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최근 큰 화제와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 의 포맷을 보면 그야말로 이러한 ‘순위사회’의 축소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101명의 연습생들이 등장하는 그 스케일만으로도 아연실색하게 되는데, 이렇게 많은 연습생들이 가진 다양한 재능들에 순위를 매기고 줄을 세워 탈락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적자생존의 이 포맷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며, ‘pick me’ 를 외치는 연습생들에게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아가 투영되었기 때문에 높은 인기를 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씁쓸한 기운마저 든다.

한편, 지난 3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지능정보사회 민관합동 간담회> 에서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지능정보산업 발전 전략’ 을 통해 우리나라의 AI 산업을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관련 기사). 이 발표에서도 순위사회의 한 단면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언어지능을 비롯한 총 5개의 분야에서 2019~2020년까지 세계 1위에 오르거나 시연에 성공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용수 미래창조과학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은 이 목표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왜 이것을 하느냐면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답을 한 바 있고(관련 기사), 정책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본다. 하지만, AI 처럼 도전적인 과제는 그에 걸맞는 문제정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단언컨대 ‘살아남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1등을 하기 위해’ 라는 동기는 ‘인류가 당면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동기에 비한다면 미약하기 그지 없는 수준의 것이다.

지난 해, Google 의 Head of Innovation 을 맡고 있는 Frederik R. Pferdt 가 서울디지털포럼(관련 동영상) 참석 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 기업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때 Frederik 은 그 기업의 임원들에게 Google 의 사명(Mission)인 ‘organize the world’s information and make it universally accessible and useful’ 를 소개하면서 ‘지속적으로 추구 가능한 사명을 세우고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그 사명을 실천할 때 그 기업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반면, ‘세계 1위’, ‘시장점유율 1위’ 와 같은 목표는 언젠가 달성 가능한 하나의 성과측정기준일 뿐이며 이런 것들은 결코 구성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없다는 견해 또한 피력한 바 있다. 나 역시 이러한 목표는 고객중심적이지도 않고 목적지향적이지도 않다는 점에서 그저 경영자들의 근시안적 이해관계를 위해 기업의 자원을 결집하기 위한 생경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앞선 포스팅 – 구글의 리더쉽 – 에서 Google 의 CEO 인 Sundar Pitchai 와 DeepMind 의 CEO 인 Demis Hassabis 는 CNN 공동기고문(원문 보기)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음을 소개한 바 있다.

현재 세계가 마주한 도전과제는 ‘인간’ 대 ‘기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도구’ 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다. 기후변화, 의료 보건, 교육 등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슈들이 있고, 수천 명의 전문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들은 이러한 전문가들에게 강력한 문제 해결 도구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긴급한 글로벌 이슈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머신러닝을 활용하여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 또 한 명의 위대한 기업가인 Tesla 의 Elon Musk 는 Tesla 의 배터리인 Powerwall 을 발표하는 프리젠테이션(관련 동영상)의 첫 장을 화석연료가 환경에 미치는 해악을 경고하는 데 할애한 바 있다.

1ap5uyou3xpshab8erstvrq<Source : https://medium.com/firm-narrative/>

  Elon Musk 는 이 Powerwall 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세계 1위의 배터리 업체가 되겠다’ 와 같은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인류를 둘러싼 심각한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Tesla 가 가진 기술을 통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의 공감을 유도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접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과학자들 중 과연 누가 ‘세계 1등이 되겠다’ 는 목표와 동기에 의해 움직였던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정의하고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평생을 다 바쳤을 때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우리 사회는 이처럼 단순명료한 진리를 놓친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1등을 하기 위해 장미빛 청사진을 그리고 ‘pick me’ 를 외친다.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 있어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이다. 알파고가 보여주었듯 최적의 의사결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어쩌면 기계와 AI의 몫이 될지도 모른다. 101명의 연습생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인기를 끌 수 있을지 분석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은 단언컨대 그 어떤 전문가보다 기계가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못 믿겠다고? 이것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New York Times 에서는 2013년 <Solving Equation of a Hit Film Script, With Data> 라는 기사(원문 링크)를 통해 데이터에 기반한 대본분석가들이 흥행을 위해 가감해야 할 요소들을 조언해 주고 있음을 소개한 바 있다. 이것조차 와 닿지 않는다면 Brad Pitt 주연의 영화 혹은 책 <Money ball> 을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한편, 우리를 둘러싼 문제를 정의하고 어떤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를 설계하는 능력은 여전히 그리고 고스란히 우리들 사피엔스의 몫이다. 국가의 백년지대계 과학정책이든, 기업이 사업을 영위하는 일이든, 차세대 스타를 발굴하는 일이든, 우리가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 올바르게 정의하는 일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해 졌다. 올바른 문제정의는 구성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의 도구들을 목적적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프로듀스 101 에서 유추할 수 있는 순위사회의 토대 위에 한국형 알파고가 꽃을 피우기 요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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