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Branding 에 관한 小考

당대의 불문학자이자 시대의 ‘어른’ 이라 할만 한 황현산 선생님의 산문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곤 생각에 잠겨 글을 쓴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서울에서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돌려야 할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염상섭이 살던 집과 현진건의 마지막 집필집은 무사한가. 이태준의 수연산방에서는 아직도 차를 팔고 있는가. 문필가들과 마찬가지로 건축가들도 관심을 가졌을 이상의 집터는 지금 누구의 소유일까.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바닷가의 갯바위에는 이상한 이끼가 있다. 썰물일 때 뜨거운 햇볕 아래서는 줄기와 뿌리가 죽어 있는 마른풀처럼 보이지만, 밀려온 바닷물에 다시 적시면 순식간에 푸른 풀처럼 살아난다. 지금 서울시는 서울을 디자인하느라고 바쁘다. 그 디자인이 기억의 땅을 백지로 만들고 통속적인 그림을 그려넣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마른 기억의 이끼를 싱싱한 풀로 일으켜 세우는 밀물이길 바란다.’     2010, 황현산, ‘기억과 장소’, <밤이 선생이다> 中

이 글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디자인 서울’ 을 기치로 내걸고 일련의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즈음에 쓰여졌다. 세빛둥둥섬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한창 지어지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서울시가 추진한 디자인 사업들은 황 선생님의 바램처럼 ‘마른 기억의 이끼를 싱싱한 풀로 일으켜 세우는 밀물’ 이 되지는 못한 듯 싶다 .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박원순 시장이 민선 6기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고, 많은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이 중에 내 눈에 자주 띄는 것이 바로 ‘서울브랜드‘ 사업인데,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서울시의 브랜드를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가 열린 시정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한데다 기업들의 디지털 마케팅을 돕고 있는 나의 직업과도 무관하지 않은터라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 이 사업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으며, 시민 투표 등을 통해 서울시의 브랜드 슬로건을 선정하는 과정을 진행 중이다.

현재 후보작으로 올라와 있는 브랜드 슬로건은 다음 세 가지이다.

  • I.SEOUL.YOU – 나와 너의 서울
  • 서울은 진행형 – seouling
  • SEOULMATE – 나의 친구 서울

세 슬로건 모두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고 디자인 관점에서도 재기발랄한 표현이라 할 만 하다. 그런데 이 슬로건들이 담아내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서울의 정체성, 즉 서울다움을 나타내는 세 가지 대표 키워드인 ‘공존, 열정, 여유’ 라고 한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상경했기 때문에 이제 만 17년째 서울에서 살고 있다. 군 복무, 직장 생활 등을 위해 부산에서 거주했던 6년 간을 제외하고도 10년 이상 서울에 거주한 셈이다. 내 정체성은 변함없는 ‘부산사람’ 이지만, 물리적으로 서울에서 거주한 시간을 감안한다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가치에 대해서 경험에 근거한 의견을 피력하기에 충분한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감히 말하건대, ‘공존, 열정, 여유’ 는 서울다움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공존.

강남구청장은 최근 ‘서울시장님께 드리는 공개질문’을 통해 한전부지 개발 사전 협상에 강남구를 배제하는 이유를 물으면서 “이럴 바에 서울시는 차라리 가칭 ‘강남특별자치구’ 설치를 중앙에 건의해 아예 강남구를 서울시에서 추방시키실 용의는 없으십니까?” 지에 대해 대답을 요구했다. 뿐인가? 자신의 아이들을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낼 수 없다며 학교 배정을 철회해 달라는 시위가 벌어지는 곳이 서울이라는 도시이다. 서울의 심장인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도시가 공존의 공간인지, 분열의 공간인지.

열정.

‘헬조선’ 이라는 절망적이고도 자조적인 단어가 작금의 대한민국을 드러내는 키워드일진대, 그 ‘헬조선’의 수도인 서울이 과연 ‘열정’ 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울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당시 온 도시를 물들였던 붉은 열정의 끄트머리라도 잡고 싶은 것일까? 세대를 막론하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도시에서 ‘열정’ 을 내세우는 건 어디에서 비롯된 자신감일까?

여유.

언어에도 효율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여유’ 라는 것이 서울이라는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각박하기 그지 없는 Busy city, 저녁이 없는 삶, 24시간 편의점, 업무와 관련된 메일의 제목마다 붙어있는 ‘급’ 이라는 Header. 육사 시인이 살아계셨다면 그가 노래했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서릿발 칼날진 그 위’ 가 바로 이 나라의 수도라는 사실에 통탄하시지 않았을까?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나 또한 기업에 있으면서 corporate culture & value 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했던 경험도 있다. 무릇 도시이든 기업이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동체에는 좋은 모습과 좋지 않은 모습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모두가 함께 바라는 이상을 추려 오롯이 담아내고 공유함으로써 같은 방향으로 손잡고 나아가는 경험을 구축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또한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박았을 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일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공동체의 구성원조차 동의하지 못하고 자조한다면 그것을 아무리 멋들어진 브랜드 패키지로 포장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외국에서 서울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티셔츠와 머그컵 몇 잔 팔기 위한 디자인에 그치지 않는다면, 이런 지난한 과정이야말로 전시행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corporate culture & value 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던 시절, 국내 30대 기업의 핵심가치와 슬로건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배경과 업종의 기업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30대 기업의 핵심가치 중 80% 가 단 4가지의 키워드로 채워져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도전’, ‘열정’, ‘신뢰’, ‘전문성’ 같은 단어들이었다. 만약 서울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도시들이 브랜드를 정립한다면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현실을 용기있게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담아내고자 하는 고통스럽고도 치열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공존, 열정, 여유’ 와 같은 아름다운 키워드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 채 서울시민들의 삶과 유리되고 말 것이다.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작금의 상황에 맞추어 수미쌍관하고 글을 맺는다.

 ‘지금 서울시는 서울을 브랜딩하느라고 바쁘다. 그 브랜딩이 기억의 땅을 백지로 만들고 통속적인 그림을 그려넣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마른 기억의 이끼를 싱싱한 풀로 일으켜 세우는 밀물이길 바란다.’


참을 수 없는 美食 의 가벼움

Mark Rothko 展 을 다녀왔다. 전시를 보기 전까지 나는 Mark Rothko 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인 몇 가지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사각의 프레임과 색상만으로 표현한 색면추상들을 통해 작가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Steve Jobs 가 생의 마지막에 그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다든지, 그의 작품이 1천억원을 호가한다든지 하는 사실은 그저 전시의 흥행을 위한 가쉽거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시의 동선은 작가의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모티브를 두었던 ‘신화의 시대(Age of Myth)’, Multiform 이라는 독특한 화풍을 통해 색면추상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던 ‘색상의 시대(Age of Colour)’,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꿈꿨던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 낸 ‘황금기(Golden Age)’ 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품 활동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 만한 많은 작품들이 서울을 찾은 것은 실로 행운이라 할 만 했는데, Mark Rothko 라는 작가가 반 세기 남짓한 활동으로 만들어 낸 Context 가 너무나 선명했던 덕분에 마지막으로 그의 무제(Untitled) 작품 앞에 섰을 때의 울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즐기고 그것으로부터 감동을 얻고자 한다면 무릇 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치 절대음감처럼 어떤 상황, 어떤 맥락에서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감동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절대적인 미감을 소유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도 하거니와 그런 사람조차도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그 대상을 관조한다면 분명 더 큰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리적인, 혹은 화학적인 특성을 측정하고 분석하는데 그치는 도구가 아니며, 총체적인 해석을 통해 기계가 이를 수 없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축복과도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탐닉하고 있는 식도락에 있어서도 나의 이러한 믿음은 확고하다.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 보자면, 많은 분들께서 블로그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하고 참고하는 소위 <OO 음식의 XX대 맛집> 과 같은 리스트들은 맛을 즐기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Context 를 결여하고 있는 반쪽 짜리 – 솔직한 심정으로는 반쪽에도 한참 못 미친다고 믿지만 – 정보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징기스칸의 몽고군처럼 소위 ‘맛집’ 이라고 하는 곳들을 질풍과도 같이 휩쓸고 다니면서 승리의 깃발을 꽂고 왕성한 정복욕을 자랑하는 이런 블로거들에게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미술 얘기로 잠시 돌아가자면, 전세계 미술관들을 누비며 경매가 Top 100 을 기록한 명작들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 한데 모은 것에 비교할 수 있겠다. 그런 사람들에게 훌륭한 비평을 기대할 수 없듯이 맛집들을 바삐 누비고 다는 이들의 혓바닥에도 특별한 감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수요미식회> 라는 TV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넘쳐나는 흥미 위주의 음식 관련 프로그램 중에서 차별화되는 포지셔닝을 염두에 둔 듯 한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결론은 이 프로그램이 TV버전의 <OO 음식 3대 맛집>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공유되는 포스팅들은 다수의 참여나마 수반되지만, 이 프로그램은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명성에 기대어 이런 류의 순위 매기기를 자행한다는 점에서 한층 더 처참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채널을 돌려 버렸던 장면은 ‘자장면’ 편 – 사실 이런 류의 기획에 왜 자장면, 떡볶이, 돈까스 같은 메뉴가 등장하는지 좀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메뉴들은 그저 기분에 따라 즐겁게 맛보면 될 뿐, 사실 ‘미식’을 논할 만한 여지가 많지 않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 에서 어느 중화요리집의 수타 자장면에 대해 황교익 씨와 김희철 씨가 전혀 다른 평을 할 때였다. 황교익 씨는 수타면의 굵기가 상당히 고른 편이라서 높게 평가한 반면, 김희철 씨는 굵기의 편차가 심할 정도로 커서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평을 내 놓았다. 같은 음식에 대해 상반된 경험을 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 못하고 갸우뚱 거리는 장면은 우습기 까지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의 단골도 아닌 사람들이 한 두 번 가 본 경험을 놓고 ‘미식’ 을 논하고 있으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사견임을 전제로, 황교익 씨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이 분께서는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메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전문적인 음식평론가로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해의 ‘깊이’와 ‘폭’ 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혔을 때, 그것은 오롯이 나만의 산 지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식문화는 지금 그 폭에 비해 깊이가 한없이 부족한 기형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유서깊은 Tailor’s shop 이 백화점이나 트렌디한 편집 매장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대를 이어 Tailor’s shop 을 찾는 손님들이 존재하는 덕분인데 이 손님들이 Tailor’s shop 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재단사와의 오랜 ‘관계’ 라고 할 수 있다. 식도락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요리사, 혹은 그 집의 주인과 얼마나 오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런 관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햇살 좋은 주말 오후에 즐겨찾는 음식점이 있다. 재료를 신선하게 쓰고 조리의 기본을 탄탄히 해서 좋아하는 곳인데, 얼마 전에 내가 좋아하던 Egg Benedict 가 메뉴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 아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다시 찾았더니 주문을 받는 직원분께서 이르기를, “지난 번에 Egg Benedict 가 메뉴에 없어서 아쉬워 하시는 것을 보고 다음에 오시면 꼭 해 드리도록 셰프님께 얘기해 놓았는데, 오늘 셰프님께서 몸이 안 좋아 결근하신 관계로 괜찮으시다면 디저트를 한 가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설령 디저트를 내어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단골의 반응을 기억하고 주방에 전달한 것만으로도 나는 이 직원분과 레스토랑에 기꺼이 박수를 쳐 드릴 수 있다. 그리고 단골에 대한 이런 수준의 배려가 존재하는 한 나는 이 레스토랑을 계속해서 찾을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은 경험들이 맥락을 이루어 이 곳에 대한 나의 만족을 배가 시켜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칼 대신 스마트폰을 든 맛집 정복자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인 경리단길 깊숙한 곳에 <한국술집 안씨막걸리> 가 있다. 원래도 좋은 전통술을 맛보고 싶을 때 종종 찾았었는데, 최근에는 훌륭한 셰프님이 합류하여 음식의 맛이 풍성해 졌다. 하루는 낙지요리를 맛있게 먹었는데 낙지도 훌륭했지만 같이 버무려진 무 생채가 아삭하니 아주 마음에 들었다. 흔하디 흔하게 맛 볼 수 있는 숨이 푹 죽은 무채와는 사뭇 다른 맛이었고, 셰프님께 맛있게 먹었다는 말씀을 전해 드렸다. 셰프님 또한 아삭한 무 생채를 좋아하신다며 다음에 오면 무 생채를 좀 더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런 교감으로 인해 나와 셰프님, 그리고 음식점 사이에 하나의 맥락이 형성될 수 있고, 이런 맥락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기회들로부터 타인의 경험에 의존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혀 끝의 즐거움이 배어나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언제나 요리사와 마주할 수 있는 주방 앞 자리 – 영어로는 bar, 일본어로는 だい(다이) – 이다. 내가 오랜 시간 즐겨찾는 음식점들 또한 이런 구조를 갖춘 곳들이 많다. 일식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어쩌면 이런 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요리사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무엇보다 음식의 맛을 배가시켜준다. 무릇 좋은 요리사라면 분명한 의도를 갖고 요리를 만들게 마련이고, 그 의도를 혀 끝만으로 파악하기엔 내 미각이 한없이 둔감할 뿐이다. 미술작품의 이해를 위해 도슨트가 존재하듯 음식을 마주할 때도 누군가의 설명이 더해진다면 맛을 즐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물며 요리를 만든 요리사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마치 작가 스스로 작품을 설명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일테니까.

새로운 맛집을 찾아가 보는 것도 적잖은 즐거움일 수 있다. 경험의 ‘폭’과 ‘깊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또한 개인의 성향에 따를 일이다. 하지만 음식을 앞에 두고 한 번 쯤 자문해 볼 필요는 있겠다. “내가 이 음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 혀 끝으로 이 음식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배를 채울 요량이라면 생략해도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그 음식으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던져 볼 질문이다. 질문을 던질 가치가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면, 음식점을 자주 찾아가서 다양한 맥락에서 음식을 맛보고 요리사 또는 주인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시나브로 이 질문들에 대해 ‘Yes’ 라고 답할 날이 올 것이고, 그 때의 즐거움은 결코 ‘Like’ 와 ‘Share’ 를 통해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감동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食道樂’ 이다.


법 앞에 불손한 사업자 VS 국민 앞에 불손한 법 – Uber X 서비스 중단에 부쳐

Uber X 가 한국에서 서비스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또한 프리미엄 옵션인 Uber Black 또한 현행법에 따라 그 대상을 제한적으로 운영한다고 Uber 측은 밝혔다. Uber 는 서비스 중단을 알리는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와 같은 결정은 우버가 한국에서 처해있는 규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한 의지의 표명이며, 한국의 이용자들과 파트너 운전자들, 그리고 지역사회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결정된 사안입니다.” (문법에 어긋남이 있어 뜻에 맞게 일부 수정함.)

이러한 辯 에 대해 혹자는 서울시 등 규제감독기관, 그리고 대한민국 현행법에 대한 불손한 태도라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가 하면, 혹자는 그동안 편리하게 이용해 왔던 서비스를 규제에 가로막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야말로 상반된 반응인 셈. 그렇다면 그 ‘현행법’ 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제1장. 제1조(목적) 이 법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에 관한 질서를 확립하고 여객의 원활한 운송과 여객자동차 운수사업의 종합적인 발달을 도모하여 공공복리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률의 세부적인 사항까지 따질 깜냥은 못되지만, 나는 Uber X 라는 서비스를 중단시키고, Uber Black 마저 극히 제한적인 형태로 축소시키버련 바로 그 ‘현행법’ 이라는 것의 목적을 보고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Uber 가 저 법의 목적에 반하는 서비스인가?

정부(국토교통부)나 지자체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관련 사업자에 대해 필수불가결한 자격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면허제도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특정 사업에 대해  면허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헌법적 가치인 선택의 자유에 대한 예외적인 사안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0년, 국민 대다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과외 등 사교육 금지’ 가 위헌 판결을 받은 것 또한 이 조치가 부모의 교육권과 과외 교사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법리에 따른 결과였다. 나는 택시사업자들의 면허가 승객들이 자유롭게 운송수단을 선택할 자유까지 침해해 가면서 지켜져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행 면허제도를 통해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의 목적인 운수사업의 종합적인 발달과 공공복리의 증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Uber 의 서비스에 만족하고 쌍수를 들어 반기는 다수의 승객들이 적지 않음을 볼 때, Uber 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들이 오히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부(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서비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법률의 제정 취지와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 국리민복 증진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Uber 의 확산에 대해 택시기사들의 생계와 처우를 걱정하는 시선도 많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현행법률이 과연 대표적인 서민계층인 택시기사들의 처우를 증진시켜 왔는가? 나는 경쟁이 부재한 상태에서 면허제도를 통해 기존사업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업주들의 배를 불려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두 업종이 바로 이 택시사업, 그리고 폭행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국민의 경악을 불러일으킨 어린이집 사업인데, 이 두 사업의 공통점이 바로 사업자의 면허취득기준은 높은 반면 종사자의 자격취득은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의 이준구 교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효율임금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바 있는데(효율임금이론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집 사건-이준구), 1년 남짓한 교육을 통해 자격을 취득한 보육교사들이 평균 130만원 내외의 월 급여로 매일 10시간 이상의 격무를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보육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지 않는가 하는 의견을 피력하신 바 있다. 나는 택시사업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쉽게 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그 처우는 열악한데 어떻게 좋은 서비스를 기대하겠는가? 그런 반면 기존 택시사업자들의 면허는 Uber 와 같은 새로운 도전자들의 위협으로부터 현행법으로 강력하게 보호받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다소 격한 표현일지 모르나, Uber 에 대한 택시기사님들의 분노와 적개심 뒤에 숨어서 웃고 있을 사람들은 다름 아닌 택시사업체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나는 정부(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입법이나 개정을 통해서라도 Uber X 그리고 Uber Black 의 운행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방향이 헌법적 가치인 선택의 자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행법인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의 목적에도 부합한다고 믿는다. 만일 정부(국토교통부)나 서울시가 Uber 의 자격에 일부 미비한 것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부분적으로 그 보완을 요구하면 될 일이다. 이마저도 Uber 가 거부한다면 그들에게도 더 이상 명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 인한 피해가 예상되는 택시사업자, 그리고 수많은 택시기사들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솔직히 말해 나는 Uber 의 진출이 택시사업자들의 매출과 이익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서울의 택시들이 승차거부를 해 가며 승객들을 입맛대로 골라태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단편적인 현상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나는 승객의 한 사람으로써 지난 십 수년 간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서울의 택시 서비스가 공급과잉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Uber 의 차량 운행대수는 얼마나 될까? 이 data 가 궁금했지만 검색만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평소 내가 Uber 를 이용할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Map 위에 등장하는 차량의 댓수는 언제나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내 짐작으로 Uber 의 시장점유율은 백분율로 볼 때 소수점 단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다른 시장으로 잠시 시선을 옮겨, 최근 수입맥주가 시장에서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대부분의 보도자료를 보면 대형마트에서의 수입맥주 점유율이 30% 대에 육박하고 있다는 내용이며 전체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아직 한 자리 수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형마트보다 훨씬 큰 요식업체 시장에서 여전히 국산맥주들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이처럼 같은 제품군 안에서도 다양한 시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종종 망각하곤 한다. 나는 Uber 정도의 서비스가 서울과 같은 Megacity 에 들어온다고 해서 단기간에 기존 택시업계를 고사시킬 정도의 충격을 줄 것이라곤 믿지 않는다. 또한 Uber 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의 충격을 받고서도 기존 택시업계가 스스로를 혁신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Uber 의 어마어마한 시장가치 등을 내세워서 마치 이 회사가 기존 택시업계를 고사시킬 수 있는 공룡기업이라도 되는 양 묘사하는 기사와 글들에 강한 거부감이 드는 이유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예측도 없이 택시업계의 피해를 보전해 주자는 비생산적 논의 따위는 없어야 한다. 그보다는 기존 택시사업자들에 대한 보다 엄격한 평가를 통해 시장 진입과 퇴출을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다. Uber 가 보여주지 않았는가? 사용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평가가 얼마나 쉽고 편리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그 대신 택시기사들의 처우를 대폭 개선시키는 한편 그 자격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효율임금이론이 만능은 아니지만, 적어도 작금의 처우로는 택시기사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며, 개선된 처우와 함께 그에 걸맞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London 의 명물로 유명한 Black Cab 의 Driver 가 되기 위해서는 London 곳곳의 도로 정보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 해야한다고 한다. 나는 내가 탄 택시의 기사님께서 목적지까지 가장 빠른 경로로 숙련된 운전 실력을 발휘해서 친절하게 운행해 주신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정말이지 택시비를 낼 때마다 내가 왜 내 스마트폰의 네비게이션을 검색해서 직접 길을 설명하고, 욕설을 들어가며 급발진 급정거로 인한 차멀미를 경험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다. 나는 업무상 택시를 탈 일이 많은데 열 번 타면 예닐곱 번은 저런 경험을 하곤 한다. 지인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Uber X 를 타면 더 저렴한 요금으로도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있는데 말이다.

법은 사회적인 합의, 그 중에서도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합의이고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우선적으로 그 합의를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데 이견은 없다. 다만, 그 법이란 것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생각할 하등의 이유는 없으며, 그 제정 취지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면 정부와 관계 기관이 나서서 발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의무를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Uber X 서비스 중단에 즈음한 나의 바램은 법 앞에 불손한 사업자를 징벌하는 것에 앞서 국민에게 불편을 안겨주는 법률을 손보는 일이 먼저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소박한 바램이다.


Wireless Music System 의 신호탄, Naim Mu-so

워낙 훌륭한 gadget review 들이 많은지라 굳이 내 얕은 취향과 지식으로 사족을 달지 않는 편이지만, 최근에 구입한 Naim Mu-so 의 경우에는 주위에 눈독 들이고 계신 분들이 제법 계신지라 며칠 간의 느낌을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얼마 전까지 audioengine A2 (지금은 A2+ 가 시중에 판매 중이다.) 와 D1 (DAC : 디지털 소스를 아날로그로 변환해 주는 컨버터) 의 조합으로 Apple 의 Airplay 를 즐겨 이용해 왔는데, 이번에 집을 옮기게 되면서 새로운 옵션을 찾던 중 눈에 띈 것이 바로 Naim 의 Mu-so 라는 모델이었다.

(audioengine A2+ 와 D1. 개인적으로 이 정도 조합이면 디지털 음원을 데스크탑으로 즐기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기준은 단순했다. 첫째, 올인원 시스템일 것. 둘째, Apple 의 AirPlay 가 편리하게 지원될 것. 셋째, 거실을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출력과 음장. 넷째, 미니멀한 디자인. 다섯째, 음역대를 가리지 않는 균형감. (물론, 가격은 당연한 제약 요인이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이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모델은 흔치 않았다. B&W 의 Zeppelin 이나 Geneva Lab 의 Model L 정도가 간간히 눈에 밟혔었지만 iPhone 의 도킹 단자가 바뀌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조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찬연하게 빛나던 하나의 모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B&O 의 Beoplay A9 되시겠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디자인. 완벽하게 지원하는 AirPlay. 5개의 드라이버 유닛 – 쉽게 말해, 저 하나의 커버 안에 5개의 스피커가 들어있는 셈 – 에 총 480W의 출력. 유일한 흠이라면 339만원에 달하는 가격. 그런데 운 좋게도 중고나라에서 박스도 뜯지 않은 새 제품을 220만원에 판매하겠다는 분을 발견해서 구매하기로 약속까지 잡았는데 당일날 판매자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하는 봉변을 당했다. 원래 지인의 물건인데 지인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하지만 그리 머지않아 이렇게 상처입은 내 마음을 단숨에 치유해 준 귀인, 아니 귀 모델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Naim 의 Mu-so 였다. 사실 이전까지 내가 Naim 이라는 브랜드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창업자인 Julian Vereker 가 카 레이서 출신이며, 독학으로 음향기기 제작을 익혔다는 것, 그리고 Naim 이 Bentley 의 카 오디오를 만든다는 스토리 정도였다. 그런데 이 브랜드에서 지난 해 4월, 첫 번 째 Wireless music system 인 Mu-so 를 출시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Daddy Geek 의 Mu-so Unboxing 영상 in YouTube

나는 이 제품의 국내 출시 소식을 온라인을 통해 접하고서는 청음이 가능한 청담동의 소리샵 매장인 ‘셰에라자데’ 를 방문하였다. 최근 판매에 주력하고 있는 모델이라 그런지 청음실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고 나는 내 iPhone6 에 저장된 몇 가지의 음원으로 사운드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판매하시는 분께는 짐짓 고민하는 척 했으나 사실 나는 그 자리에서 구매를 결심하고 말았다. 사실 며칠 뒤에 영국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 현지에서 구매해 올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직접 들고 올 수고와 세금을 감안했을 때 국내에서 구매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던 지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Mu-so 에 대한 평은 전문가들의 review – 개인적으로 WIRED’s Top Picks from CES 2015 에 Mu-so 가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 에 맡기고 나는 내 기준과 경험에 비추어 이 제품에 대한 소감을 말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이 제품의 미덕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단연 ‘간결함’ 이라고 할 수 있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온전히 Wireless 로 음악을 즐기는 데에만 집중한 덕분에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적으로도 대단히 간결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전원 케이블만 잘라버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드웨어의 디자인은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다. 사실 웹상에서 이미지로만 보자면 별 매력없는 직육면체 스피커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실물의 소재감은 그 완성도가 상당하다. 이 제품이 iPhone 과의 조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Steve Jobs 마저도 흡족해 했을 디자인이라 할 만 하다. 또한 이 디자인은 단지 외관상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사용자의 경험마저도 우아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일주일 째 이 제품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피곤하거나 귀찮은 동작을 취해 본 적이 없다. 기능미 측면에서도 남다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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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hone 6 Space Grey 와는 마치 원래 한 쌍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

자, 다시 나의 구매 기준으로 돌아가 보자. 첫째, 올인원 시스템일 것. 이 제품은 Naim 에서 명명한 바와 같이 Wireless music system 이다. 즉, 소스 기기+앰프+스피커, 이 모두가 하나의 디바이스로 해결된다는 뜻이다. 사실 다양한 조합을 경험해 본 오디오 매니아가 아니고서야 소스 기기+앰프+스피커를 개별 조합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잘 완결되어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며, Naim 이 Bentley 의 카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축적한 노하우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둘째, Apple 의 AirPlay 가 편리하게 지원될 것.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연결이 쉽고 매끄러운 것은 물론, 디바이스의 콘트롤 패널, 리모컨은 물론 스마트폰의 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도 모든 콘트롤이 가능하다. AirPlay 뿐만 아니라 Bluetooth는 물론, UPnP에 Spotify 까지, 가히 모든 Wireless 음원을 매끄럽게 지원한다고 할 만 하다. 개인적으로는 AirPlay 이외에 인터넷 라디오도 즐겨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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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o 의 m.app 홈 화면. Apple App store 와 Google Play 모두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이 app 을 사용하면서 머지 않아 가정의 많은 디바이스들을 m.app 으로 콘트롤 하는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셋째, 거실을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출력과 음장. 유닛과 출력만으로 사운드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없지만, B&O Beoplay A9 과 비교해 보자면, 6개의 유닛에 450W 의 출력은 두 모델의 가격차(국내 공식가격 기준으로 140만원 차이) 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 모델이 AirPlay 등 Wireless 에 집중하고 있다보니 가끔 과거의 iPhone 도킹 스피커나 블루투스 스피커와 비교해서 성능이 어떠냐고 묻는 분들이 계신데, 사실 Beoplay A9 과 Mu-so 는 그러한 모델들과는 카테고리 자체가 다른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막귀’로 듣는다 하더라도 두 체급 사이의 사운드 격차는 양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어지간한 가정의 거실은 채우고도 남음이 있을 사운드이니 기존의 도킹 스피커는 잊으시길. (참고로 B&W 의 Zeppelin Air 가 150W, B&O 의 Beoplay A8 이 105W 의 출력을 보여준다.) 넷째, 미니멀한 디자인.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고, 이 모델의 미려함은 직접 보고 느끼시는 편이 낫다. 나는 셰에라자데에 진열되어 있던 스탠드까지 함께 구매했는데 TV 스탠드나 선반에 애매하게 얹어두는 것 보다는 별도의 스탠드와 함께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두는 편이 이 모델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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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음역대를 가리지 않는 균형감. 나는 비록 사운드나 오디오에 대해서 평을 할만한 경험이나 식견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장르의 음악을 가리지 않고 듣는 취향 때문에 치우침 없고 고른 소리를 들려주는 점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셰에라자데에서 청음했을 때 선택한 음원이 Kendrick Lamar 와 Keith Jarrett 이었는데 양쪽 모두 만족스러웠다. 오늘도 아침엔 Kasabian 을 듣고 저녁엔 Vivaldi, The four seasons, recomposed by Max Richter 를 들었다. 이 정도 스펙트럼이면 제법 괜찮지 않나 싶다.

종합적으로 만족스러운 제품인지라 결과적으로 호평일색의 review 를 남기게 되었지만, 일부러 흠을 잡고 싶어도 불만스러운 부분이 딱히 없으니 나로써도 어쩔 도리가 없다. 감히 예견하건대, 앞으로 Mu-so 를 신호탄으로 Wireless music system 라는 제품군에 새로운 도전자들이 속속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디지털을 단순히 아날로그에 비해 열등한 음원으로 치부하기에는 (CD 가 LP 에 대해 그러하였듯) 우린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까. 기왕에 올거라면 제대로 오는 것도 훌륭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Mu-so 가 바로 그런 제품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 드리워진 Gresham의 망령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영국의 경제학자 Thomas Gresham 에게는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그가 주창한 Gresham’s law 를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에 묘사하는데 어쭙잖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화폐금융론 등의 경제학 과목에서 화폐의 역사를 공부할 때 꼭 등장하는 법칙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이 바로 Gresham’s law 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라는 문장으로 유명한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보관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화폐의 특성상 좋은 돈, 즉 주화의 원재료인 금과 은 등의 함량이 높은 돈은 금고에 쌓이게 되는 반면, 나쁜 돈, 즉 원재료의 함량이 낮은 돈만 주로 유통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법정통화, 즉 중앙은행이 그 가치를 보장하는 현대의 화폐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주화 자체가 곧 가치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따라서 함량 미달의 주화가 통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부와 중앙은행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현대의 법정통화에는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지 모르나 내 소견으로는 빳빳한 새 지폐는 지갑 속에 아껴두고 쭈글쭈글한 헌 돈을 먼저 쓰는 것도 이 법칙이 사람들의 심리에 남겨 둔 흔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구축(驅逐)’ 이라는 한자어는 한시 바삐 폐기되어야 마땅할 듯 싶다. ‘몰아낼 구’ 에 ‘쫓을 축’ 이 더해진 조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좀체 쓰지 않는 표현이므로 그냥 쉽게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 로 쓰더라도 충분히 그 뜻이 통하지 않을까 싶다. 영어로도 ‘drive out’ 이라고 쓴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고 화폐시장을 잠식하게 되면 경제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신뢰(trust) 가 무너진다. 당신이 물건을 사고 팔 때 주고 받는 돈의 가치를 100%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떻게 거래가 성사될 수 있겠는가? 각자가 저마다의 저울을 짊어지고 다녀야 할테고 이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낭비를 초래하게 된다. 시장에 규율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면 아마 그 경제는 교환경제 이전의 자급자족 경제로 회귀할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이런 지경에 처해 있다. 문제는 이 Gresham 의 망령이 화폐가 아닌, 이 사회 전반에, 그것도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상권

신촌, 홍대, 가로수길, 경리단길. 밀레니엄 이후, 이 따분한 도시 서울에 그나마 빛과 소금 같은 활력을 불어넣었던 지역들이다. 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초기의 상인들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몰리면 몰릴수록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임대료가 오르면 오를수록 따분한 취향의 대형 자본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가던 경리단길의 한 술집에 앉아 맞은 편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시뻘건 간판을 보면 짜증마저 솟구친다. 대형 자본의 허접한 취향이 지역을 살리는 우아한 취향을 몰아내고 있다.

#2. 정치인들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사는 군부를 위시한 기득권층과 이에 맞서는 민주화세력 간의 충돌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기득권층에서는 끊임없이 그 권력을 세습하는 반면, 민주화세력은 새로운 세대에게 배턴을 물려줄 전략도 의지도 없이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다. 능력있는 젊은 인재들은 흐린 물에는 발조차 담그려 하질 않으니, 인사청문회장은 정화조가 되어가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지방자치제는 현대판 음서제로 썩어가고 있다. 대의를 책임질 깜냥이 안되는 얼치기 정치꾼들이 자격있는 새로운 세대를 몰아내고 있다.

#3. 정명훈과 안현수

정명훈 씨는 한국 사회에 큰 빚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에스트로는 고국을 택했고 덕분에 우리는 훌륭한 음악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 역시 서울시향의 정기공연에서 훌륭한 무대에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러시아로 떠난 쇼트트랙 챔피언은 어떠한가? 본인은 애써 ‘그저 달리고 싶었다’ 라고 말을 돌리지만 그 표정에 묻어나는 진심은 그의 말처럼 간단치 않았다. 천박하고 추악한 다툼들이 거장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있다.

이렇게 다 몰아내고 나면 과연 우리 앞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진심으로 걱정이 앞선다. 악화가 시장을 잠식하면 교환경제가 무너지고 자급자족경제로 회귀하게 되듯이, 우리도 각자도생의 처절한 사투에 임하게 되지 않을까? 정부가 할 일이 곧 악화를 가려내는 저울의 역할일진대, 내가 보기엔, 그리고 많은 분들의 생각에 비추어 보건대, 지금의 정부는 눈금이 없는 저울과도 같다. 뻔뻔하게 악화를 들이미는 무뢰배들이 판치는 꼴을 눈 뜨고 볼 생각을 하니 다가오는 2015년이 암담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말,

서두에 밝혔지만, 사실 Gresham’s law 는 보관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화폐의 특성에 기인한 법칙이다.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몰아낸다라는 무척 단순한 메세지 때문에 다른 현상에도 쉽게 빗대어 쓸 수 있는데, 나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이런 愚 를 범한 것에 대해 글을 읽는 분들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Home Brewing Class (3)

드디어 맥주를 맛 보기 위한 마지막 단계, 병입(bottling) 을 시도할 차례입니다. 일주일 간 발효조에서 보관한 Amber Ale 을 병에 담게 될텐데요. 마음 같아선 유리병에 담아 멋지게 Labeling 도 하고 싶지만, 여건상 페트병에 담도록 하겠습니다.

1. Priming

병입을 하기 전에 Priming 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용어는 참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prime’ 이라는 단어가 동사로 ‘사용 또는 작동할 수 있게 준비시키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듯 합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맥즙에 효모를 투여하고 적정한 온도에 보관을 하면 발효가 진행되는데요. 이를 통해 맥즙의 당이 효모에 의해 알콜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됩니다. 그런데 이 때 생성된 이산화탄소는 Airlock 의 구멍을 통해서 배출이 되기 때문에 발효조 속의 맥주에는 탄산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한 마디로 김 빠진 맥주인 셈이지요. 따라서 맥주를 맛있게 즐기기 위한 탄산을 생성하기 위해 병입 직전에 한 번 더 당을 추가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priming’ 이라고 부릅니다. 한 마디로 효모에게 마지막 먹잇감을 던져줌으로써 추가로 탄산을 생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알콜 또한 추가로 생성되겠지요.

저희 클래스에서는 Corn Syrup 1컵을 물 2컵에 희석한 다음 10분간 끓인 것을 ‘priming’ 에 사용하였습니다. Corn Syrup 이란 별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물엿’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효모가 분해할 당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정백당 등 다른 원료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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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ing 에 필요한 당의 양은 맥주의 양, 탄산의 양, 그리고 맥주의 온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탄산의 양은 맥주의 종류에 따라 가장 훌륭한 맛을 내기 위한 권장량이 존재하구요. 이런 변수들을 고려한 계산식(Calculator) 을 활용하시면 됩니다. (Calculator 바로가기)

2. 병입(Bottling) 준비

병입 준비는 곧 살균소독입니다. 이미 설명 드린 바 있듯이 발효 과정부터는 다른 요인들이 맥주의 맛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잘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Povidon (요오드 용액) 등을 이용해서 발효조, 병, 뚜껑, Siphon(기압차를 이용해 맥주를 발효조에서 병으로 옮겨 담는 장비) 을 꼼꼼하게 소독합니다. 특히 병을 재활용하는 경우라면 솔 등을 이용해서 세척 후 소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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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Final Gravity 측정

병입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습니다만, 한 가지 챙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Final Gravity, 즉 발효 후 비중인데요. 이 Final Gravity (이하 ‘FG’)와 발효 전 Original Gravity(이하 ‘OG’) 의 차이를 통해 맥주의 알콜 도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발효 과정을 통해 효모가 당을 알콜로 분해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발효 전후의 비중 차를 통해 알콜 함량을 도출할 수 있음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산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OG – FG)*131+0.3 = Alcohol % of Beer

0.3 이라는 상수를 왜 더하는지 궁금하실텐데요. 앞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Priming 을 통해 병입 후에 추가로 알콜이 생성되는 것을 감안한 조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희가 양조한 Amber Ale 의 경우 OG 1.050, FG 1.010 으로, 약 5.54% 의 알콜을 생성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입니다.

4. 병입(Bottling)

Priming 을 위해 끓인 콘시럽 용액을 충분히 식힌 다음, 새 발효조에 투여합니다. 그런 다음 사이펀(Siphon) 을 이용해 기존 발효조에 있던 맥주를 콘시럽 용액이 든 새 발효조로 옮겨 담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사이펀(Siphon) 을 이용해 콘시럽 용액이 첨가된 맥주를 잘 소독한 페트병에 옮겨 담습니다. 이 때 페트병의 마개는 밀폐성이 높은 내압마개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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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후발효

이렇게 병입한 맥주는 탄산을 생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1주일 정도 더 발효를 진행합니다. 효모가 활동하기 좋은 적정온도를 유지해야겠지요. 그런 다음 냉장고로 옮겨 다시 1주일 정도 더 보관하면 맥주의 훌륭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병을 열어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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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음

사실 제 경우에는 Home Brewed Beer 의 맛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맥주를 맛을 더욱 깊이 음미하고 싶었을 따름인데, 첫 번 째 Amber Ale 은 그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맛을 보여 주었습니다. Ale 의 스펙트럼 중 가운데에 위치하는 맥주답게 균형잡힌 맛을 보여준 데다 여름에 어울리는 청량감도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함께 즐긴 분들도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더군요. Pizzeria D’buzza 의 Quartro Fungi 와의 Mariage 도 제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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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Drinking vs. Tasting

막간을 이용해 다양한 맥주들의 맛을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맥주를 ‘마신다(drink)’ 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이 ‘drinking’ 과 ‘tasting’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와인을 즐기는 문화와 맥주를 즐기는 그것을 대척점에 놓고 보면 더욱 그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질 텐데요.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께서는 와인의 섬세함과 미묘함을 어떻게 맥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분명 술을 대하는 태도가 그 맛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맥주도 와인을 즐길 때 만큼의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별 생각없이 들이킬 때와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맥주의 tasting 은 단순히 맛을 즐기기 위한 casual tasting 에서부터 교육적인 목적의 educational tasting, 그리고 보다 전문적인 역량을 겨루기 위한 BJCP(Beer Judgement Competition program) 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Color, Clarity, Aroma, Taste, Mouthfeel 등 의 요소를 음미하게 되는데, 저희 클래스에서는 첫 시음으로 Max ‘Czech Special Hop’ 부터 Ballast Point ‘Sculpin’ 에 이르는 7종의 스펙트럼을 시음했습니다. 제 경우에는 저희 클래스의 선생님인 Magpie 의 Jason 이 즐겨 마신다는 Sonnen Hopfen 이 흥미로웠고, 요즘 인기가 많은 Sculpin 보다는 Coronado 의 Islander IPA 가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맥주의 색상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게 Lovibond 색상표가 그려진 맥주잔을 처음 보았는데, 이런 도구들이 맥주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즐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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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첫 브루잉을 마치며…

이렇게 해서 제 첫 번 째 Home brewing 을 마쳤습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다.’ 라는 경구처럼, 언제나 별 생각없이 벌컥벌컥 들이키던 맥주의 맛이 이제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맥주가 어디서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를 찬찬히 되짚어 보게 된다고나 할까요? 그 상상의 여정을 통해 맥주의 맛을 한 올 한 올 풀어나가는 즐거움이 만만찮습니다. 다음 번 브루잉은 IPA 인데요. 재료만 다를 뿐 브루잉 과정에는 큰 차이가 없어 포스팅은 생략할까 합니다. 그럼 DME 를 사용하는 Extract Brewing 이 아닌, All Grain Brewing 으로 계속해서 포스팅을 이어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ome Brewing Class (2)

수수보리 아카데미의 Home Brewing Class, 그 두 번 째 내용입니다. 지난 번에는 Brewing 의 전반을 개괄했다면, 이번부터는 실제 Brewing 을 실습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Mashing, 즉 맥즙을 만들어 내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는 대신, DME(Dry Molt Extrator) 등 미리 만들어진 재료를 사용하는 Extract Brewing 에서 시작합니다. 물론 커리큘럼에 따라 All Grain Brewing 등 더욱 난이도 높은 과정을 실습하게 되겠지요. 오늘의 Recipe 는 다음과 같습니다.

1. Recipe for Summertime Amber Ale

처음으로 만들 맥주는 Amber Ale 입니다. Amber Ale 은 Pale Ale 의 일종으로, 유럽보다는 북미, 호주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는 맥주입니다. Lovibond (맥주의 색 지수 단위 중 하나) 로 보나, 쓴 맛의 정도로 보나 Ale 계열 중 중간값에 가까운 대중적인 맥주라고 할 수 있지요. Amber malt 나 Crystal malt 를 재료로 하며, 일반적으로 얇은 구릿빛 또는 얇은 갈색을 띕니다. 이번 시간에 brewing 한 Recipe 는 다음과 같습니다.

1) Malt : 효모의 먹잇감이 되는 Base Malt 로는 이미 당화까지 완료된 DME 를 사용합니다. 색과 풍미를 더하기 위한 Specialty Malt 로는 Caramunich 와 Carapils 를 선택했습니다.

– 2.5kg’s Light Dry Malt Extractor (Base Sugar)

– 300g’s Caramunich 2 malt (Specialty Malt)

– 100g’s Carapils malt (Specialty Malt)

2) Hop : 맥즙이 끓는 시간에 따라 Hop 을 여러 단계로 투입하면서 쓴 맛, flavor, aroma 를 더하게 되는데요. 이번 Recipe 에 사용할 hop 과 투입 시간, 그리고 각각의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같은 Cascade 를 서로 다른 타이밍에 서로 다른 목적으로 투입하는 것을 보실 수 있을텐데요. 이것은 같은 Hop 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오래 끊이느냐에 따라 Alpha Acid 의 생성량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즉, 일찍 투입할 수록 쓴 맛에 관여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나중에 투입할 수록 flavor 나 aroma 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Hopping 이야말로 맥주의 variation 을 결정짓는 마술과 같은 과정인데요. 최근에는 단 하나의 Hop 만으로 맥주의 맛을 내는 Single Hopping 의 개념도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Mikkeller 의  Single Hop Series 가 대표적인 제품이지요.

– 14g’s of Hallertau (60 mins, for bittering)

– 28g’s of Cascade (30 mins, for flavoring)

– 28g’s of cascade (5 min, for aroma)

 

자, 그럼 사진과 함께 첫 Extract Brewing 과정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1. 각종 도구, 양조용수 계량, DME 와 Hop 계량 등 Brewing 을 위한 준비를 갖춥니다.

2. Specialty Malt 를 약 섭씨 70도로 데워진 물에 담가 15~30분 정도를 우려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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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pecialty Malt 가 꺼낸 다음, 우려진 물을 가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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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ME 를 붓고, 뭉치지 않도록 충분히 저어 줍니다. 빠르게 저어주지 않으면 DME 가 바닥에 가라앉아 카라멜처럼 굳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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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계속 가열하여 섭씨 100도에 다다르면 첫 번 째 Hop 을 투입하고 저어줍니다. 60분 카운트를 시작해야겠지요? 30분이 지나면 두 번 째 Hop 을, 60분이 다다르면 마지막 Hop 을 순차적으로 투입합니다. 처음 Hop 을 투입할 때 맥즙이 갑자기 끓어 넘칠 수 있으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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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Hopping 을 하는 동안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요? 그동안 미리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발효를 위한 도구와 장비들을 깨끗이 소독하는 것인데요. Hopping 과 같이 끓이는 과정에서는 세균이나 박테리아에 의한 오염을 걱정할 것이 없지만, 발효 과정이 시작되면 철저하게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마시는 사람의 건강 뿐 아니라 맥주의 맛에 있어서도 위생은 매우 매우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지요. 발효조를 소독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Povidon (요오드 성분의 소독약) 1 테이블 스푼에 8리터의 물을 희석해서 세척해 주면 됩니다. Brewer 의 손은 70% 에탄올로 가볍게 씻어주면 좋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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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막간을 이용해서 수강생 중 한 분이 직접 빚고 말린 전통주와 육포를 맛보았습니다. 이런 것이 함께 배우는 즐거움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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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Hopping 이 끝나면 빠르게 식혀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때, 찬 물을 흘려보내 맥즙을 식혀주는 Chiller 라는 도구가 유용하게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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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약 섭씨 25도 이하로 식혀진 다음, 발효조로 옮겨 담게 됩니다. 이 때, 산소와의 접촉을 위해 2~3 차례 붓고 따르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맥즙과 산소가 접촉하는 것은 이 때가 마지막입니다. 발효가 시작된 이후에는 산소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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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제 먹잇감이 모두 준비되었으니, Yeast(효모) 를 투입할 차례입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체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Gravity(비중) 입니다. 발효 전후의 Gravity 를 비교하면 알코올 도수를 계산해 낼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발효 전에 측정하는 Gravity 를 Original Gravity 라고 부르는데, 요즘 모 브랜드의 맥주 광고에서 이 용어를 마치 하나의 특수한 공법인양 선전하더군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천연 암반수를 썼다는 둥 물맛을 강조하더니 이제는 ‘물을 넣지 않았다’ 는 것을 자랑인양 내세우는 건 참 민망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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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 이제 발효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Yeast(효모)를 고르게 잘 뿌려준 다음, 뚜껑을 잘 닫고 Air lock 이라는 마개로 밀폐합니다. Air Lock 은 밀폐를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발효의 부산물인 이산화탄소의 배출구 역할도 합니다. 잘 마감된 발효조는 약 발효에 적합한 온도(Yeast 마다 다릅니다.) 의 저장소에 보관합니다. 이 때, 발효조에 라벨을 붙여 Brewer, 작업일자, Original Gravity 등을 기록해 두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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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것으로 첫 번 째 Brewing 의 발효 전 단계까지를 경험해 보았습니다.

일주일 동안 효모가 맛깔 난 알코올을 만들어 주길 기대하며, 다음 포스팅에서는 Bottling 등 발효 후 마무리 작업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To be continued……


Home Brewing Class (1)

* 앞으로 석 달 동안 참가하게 된 수수보리아카데미의 Home Brewing Class 에 대해 기록을 남길 예정입니다. 제 개인적인 강의 노트입니다만, 맥주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여 블로그에 공개합니다.

술을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를 글로 쓰자면 너무나 긴 얘기가 될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그래서 그 방법과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는데, 마침 ‘수수보리 아카데미‘ 라는 아주 멋진 이름의 기관에서 제 구미에 딱 맞는 홈브루잉 과정을 개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체없이 등록하였습니다. 제가 등록한 평일반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며 총 석 달 간 12번의 수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분간 저에게 목요일 저녁 약속은 없는 셈이지요. 강사는 Macpie Brewing Co. 의 Co-Founder 인 Jason Lindley 이며, 수수보리 아카데미의 조효진 교수님이 진행을 도와 주십니다. 그리고 가끔 Seoul Homebrew 의 Mitchell Nichols 도 강의에 참여한다고 하네요. 홈브루잉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물론, 서울의 맥주업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당사자들을 함께 만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6월26일(목)에 첫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 날은 맥주양조의 기초 이론을 익히는 시간이었는데,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석 달 간의 긴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죠.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이 참석했는데, 어림잡아 80% 정도는 요리사 혹은 바리스타 등 유사 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었고, 저처럼 취미 삼아 참석한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 강의를 위해 매주 한 번 부산, 전북 외도 등에서 올라오시는 열정 넘치는 Home brewer 들도 계시더군요. 맥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첫 날 배운 맥주 양조 이론의 기초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보리에 싹을 틔워 맥아(malt) 를 만듭니다. (‘맥아(malt)’는 엄밀히 말하자면 싹 틔운 보리, 즉 ‘malted barley’ 를 말하는 셈입니다.)

2. 적정온도의 물에 맥아를 담가 효소(enzymes)가 맥아의 전분(starches)을 당(sugars)으로 분해하도록 합니다. 즉, 다당류를 단당류로 분해하는 셈인데, 이것은 나중에 효모(yeast) 가 당을 먹고 알코올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효모는 다당류를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당화가 진행된 액체를 ‘맥즙(wort)’ 라고 합니다.

3. 맥즙을 끓이고 홉(hop) 을 투입하여 더 끓여냅니다. 사실 이 과정은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데, 맥주의 색, 향, 맛, 질감 등을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맥즙과 홉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블렌딩이라고 할까요? 어느 시점에 어떤 맥즙과 홉(hop)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맥주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끓이는 과정을 통해 홉의 맛을 이끌어 낸 다음, 이것을 빠르게 식히고 여기에 효모(yeast) 를 첨가합니다. 그리고는 발효조를 밀폐(엄밀히 말하면 밀폐는 아닙니다. 효모가 만들어 내는 Co2 는 밖으로 배출해야 하니까요. 다만 외부의 공기나 이물질이 발효조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Airlock 과 같은 장비로 조치합니다.)한 다음 발효과정을 진행하게 됩니다.

5. 발효가 완료되면 병입하는 것으로 홈브루잉 과정은 마무리 됩니다.

개념은 아주 간단하죠. 보리에 싹을 틔운 다음, 당화 과정을 통해 효모가 알코올을 만들어 낼 수 있게 준비하고, 그 사이에 홉을 넣어서 맥즙의 단맛과 홉의 쓴 맛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거죠. 충분히 끓여서 맥즙과 홉의 색, 향, 맛, 질감 등을 이끌어 낸 다음 효모가 당을 분해해서 알코올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겁니다. 홈브루잉이나 상업양조나 원리는 같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수많은 variation 이 있을 거구요.

참고로 위스키의 경우에는 당화까지는 같은 과정이 진행되지만, 홉이 들어가지 않은 채로 발효된 다음, 증류와 숙성 과정을 거치게 되지요. 증류를 하는 이유는 효모가 당을 알코올로 분해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물과 알코올의 끓는 점 차이를 이용해서 알코올만 분류해서 더 높은 도수의 술을 얻어내는 겁니다. 알코올의 끓는 점이 물의 그것보다 낮으니 먼저 끓어 나오겠지요. 그걸 따로 모으면 풍미을 머금은 위스키 원액이 만들어 지게 되고, 이것을 오크통 등에 담아서 숙성시키면 그 풍미가 더 깊어지는 겁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볼까요? 소주도 위스키와 똑같은 증류주인데,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소주는 희석식 소주입니다.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제가 이해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증류식 소주나 희석식 소주나 곡물을 발아, 당화, 발효시킨 다음 증류과정을 통해 높은 도수의 알코올을 얻어내는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희석식 소주는 이후에 감미료 등을 넣어서 맛을 더합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당연히 증류의 결과물 그 자체로는 술의 맛과 풍미가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희석식 소주를 공격하는 분들이 ‘희석식 소주는 에탄올에다가 물과 감미료를 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냥 에탄올이라고 하는 것은 좀 심한 지적이지만, 원재료에서 비롯되는 맛과 풍미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괜히 저렴한 게 아니란 얘기지요.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의 맛과 풍미를 비교해 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둘을 얼음 혹은 물에 타서 드셔보는 겁니다. 증류주는 맛과 풍미가 피어오르겠지만, 희석식 소주를 그렇게 드시는 것은 매우 거북스러운 경험이 될 겁니다. 물론 요즘 말로 ‘가성비’ 라는 게 있으니, 선택은 드시는 분의 몫입니다.

다시 맥주 얘기로 돌아오면, 요즘 많은 분들이 맥주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소주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 드린 바 처럼, 맥주의 맛과 풍미의 핵심은 홉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우리나라 맥주들은 어떤가요? 홉 함량이 낮을 뿐 아니라, 다양한 홉으로 다양한 맛을 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광고를 할 때, 홉이 아니라 물을 내세웠었지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에라도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고 기존의 맥주업계도 이런 흐름에 자극받아 신제품들을 출시하고 있는 것은 반길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진짜 변화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려고 합니다.

스크롤의 압박도 있고 하니,  7월 3일(목) 의 두 번 째 강의, 즉 첫 번 째 실습의 내용은 다음 포스팅으로 넘길까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그 과정을 진행하게 되는데요. 다만, 당화의 과정을 간소화해서 DME(Dried Molt Extractor) 라는 분말 맥즙을 사용하게 됩니다. 사진과 함께 설명 드리도록 할께요.


Lone Survivor : 우리 사회의 명예율은 무엇인가?

 

전쟁은 하나의 분명한 장르를 형성할 만큼 영화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소재 (혹은 주제) 중 하나이다.  영화가 그 시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지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장르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인데, (미국의 관점에서) 피아와 선악의 구분이 명확했던 20세기의 작품들이 영웅담(<람보>, <코만도>)이나 정치적 메세지(<플래툰>, <지옥의 묵시록>)를 담아내는데 주력한 데 반해, 미국이 패권을 장악한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실화에 기반한 리얼리즘이 전쟁 영화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이라는 군사적 라이벌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세계의 경찰로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미국에 대한 경계와 우려의 시선들을 헐리우드 자본도 인지했기 때문일까? 이제 람보와 코만도의 작전수행권은 어벤저스에게 이양되었고, 주적은 공산세계 대신 외계인이나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악덕자본으로 바뀌었다. 결국 전쟁 영웅의 무용담이나 정치적 수사를 영화에 담아 낼 여지는 지극히 좁아졌고, 그 대신 헐리우드의 감독들은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미군이 개입하고 있는 현장으로 눈을 돌리기에 이르렀다.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이 아니라, 분쟁 지역에서의 국지전 양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거시적인 ‘전쟁(war)’ 영화의 자리를 미시적인 ‘전투(battle)’ 영화가 대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전투영화의 서막을 연 작품은 누가 뭐라해도 Ridley Scott 의 2001년 작 <Black Hawk Down> 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1993년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한 미군과 소말리아 민병대 간에 벌어진 전투를 다루고 있는데, 20세기의 전쟁영화들과는 달리 정치적 수사와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가전의 치열하고 처참한 상황에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앵글을 들이댔다는 점에서 전투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Black Hawk Down> 은 작금에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으로도 유명하다. Josh Hartnett, Eric Bana에 Ewan McGregor 까지. 게다가 OST 는 거장 Han Zimmer 가 맡았다.) 이렇게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Philadelphia Inquirer 紙 의 Mark Bowden 이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동명의 원작이 존재했기 때문인데, 이와 유사하게 전투의 세세한 부분까지 담아낸 원작에 기초한 또 한 편의 작품, <Lone Survivor> 가 지난 해 말 세상에 공개되었다.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된 실화에 기초하고 있고, 제목이 어느 정도 결과를 암시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스토리보다 묘사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는 점에서 다음 단락을 쓴다.)

<Lone Survivor> 는 2005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인 Zabul 에서 미군에 의해 전개된 Red wing 작전의 실화에 기초하여 만들어 졌다. 당시 미군은 걸프만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던 시기인지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진압을 위해 대규모 병력 투입 대신 요인 암살 위주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중 Osama bin Laden 의 측근 중 한 명인 Ahmad Shah 의 제거를 위해 전개된 작전이 바로 Red wing 이었다. 먼저 투입된 4명의 SEALs 정찰조가 잠복 중에 양치기들과 마주치게 되고 격론 끝에 교전수칙을 준수하여 이들을 풀어주지만 삽시간에 추격해 온 탈레반들의 공격에 맞서다 결국 Marcus Luttrell 하사를 제외한 3명이 전사하였고, 뿐만 아니라 이들을 구조하러 온 8명의 SEALs 대원들과 8명의 160th SOAR – ‘Night Stalkers’ 라고도 한다 – 들이 탄 Chinook 헬기마저 로켓포에 격추되어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전사자 중에는 한국계 James Suh 병장도 포함되어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만리타국에서 영면에 든 그의 명복을 빈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전투영화 중에서도 산악전의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메마른 바위가 곳곳에 드러난 험준한 지형 – 실제 촬영은 뉴멕시코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 에서의 전투 장면은 극도의 사실감을 성취하고 있으며, 특히 두 번에 걸친 절벽 다이빙 장면은 절묘한 앵글과 속도감으로 마치 내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전달한다. 이처럼 완성도 높은 표현만으로도 이 영화는 전투영화의 역사에 그 이름을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묘하게도 <최종병기 활> 을 떠올렸는데, 비록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장르로만 놓고 보자면 두 영화가 ‘산악전 영화’로 함께 엮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서사적인 부분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이 영화를 권해 드리고 싶다. 심지어 그 서사는 영화 중에는 등장하지 않고, 엔딩 크레딧에 이르러서야 그 실마리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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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wing 작전의 외로운 생존자(lone survivor)인 Marcus 는 한 부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 부족은 이방인인 Marcus 를 지켜주느라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큰 희생을 치르게 되는데,  그 부족이 목숨을 건 일전을 불사하며 이방인을 지켜준 것은 그들이 2천 여 년 동안 지켜 온 명예율(Code of honor)인 ‘Pashtunwali’ , 즉 적에게 쫓기는 사람은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지켜주어야 한다는 원칙과 전통 때문이었다. (사실 ‘Pashtunwali‘ 란 ‘Pashtun 사람들의 법’ 이라는, 훨씬 넓은 의미의 단어이다. 이 중에서 ‘hospitality’, 즉 손님들에 대한 차별없는 호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슬람의 관용을 생각한다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고백컨대, 엔딩 크레딧에 이 자막이 올라가기 전까지 나는 그 부족의 호의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저 대목도 실화일까? 재미를 위해 각색한 부분이 아닐까? 어떻게 생면부지의 미군을 위해 같은 종족과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일 수 있을까? 감독이 자막을 이용한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서사를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오랜 세월동안 살아남은 것에 대한 존중은 가벼이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물질이건 제도이건 혹은 정신이건,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낸 모든 것은 존중받을 마땅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위험에 처한 손님을 목숨 걸고 지켜주는 불문율을 2천년이 넘도록 명예롭게 지켜가는 마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난 4월의 참사를 겪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과연 우리 사회의 명예율은 무엇일까? 시대를 거슬러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의 명예율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존재하기나 하는걸까?

회의에 가득 찬 자문에 희망 섞인 답을 내 놓을 수 있기를. 우리 모두의 마음으로 그리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덧,

<Loan Survivor> 중 Patton 하사의 신고식에 등장하는 Speech. SEALs 대원들의 Mission Statement 라고나 할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씌여진, 기업의 고리타분한 그것과는 달리, 팀원들끼리 정체성과 동질감을 고무하는 날것의 느낌.

Been around the world twice. Talked to everyone once. Seen two whales fuck, been to three world fairs. And I met an old man in Thailand with a wooden cock. Pushed more peter, more sweeter and more completer than any other peter pusher around. I’m a hard bodied, hairy chested, rootin’ tootin’ shootin’, parachutin’ demolition double cap crimpin’ frogman. There ain’t nothin’ I can’t do. No sky too high, no sea too rough, no muff too tough. Been a lot of lessons in my life. Never shoot a large caliber man with a small caliber bullet. Drove all kinds of trucks. 2by’s, 4by’s , 6by’s and those big mother fuckers that go ‘Shhh Shhh’ and bend in the middle. Anything in life worth doing is worth overdoing. Moderation is for cowards. I’m a lover, I’m a fighter, I’m a UDT Navy SEAL diver. I’ll wine, dine, intertwine, and sneak out the back door when the refueling is done. So if you’re feeling froggy, then you better jump, because this frogman’s been there, done that and is going back for more. Cheers boys.

세상을 두 바퀴 돌고 모두를 만나봤지. 고래의 교미와 박람회도 봤네. 태국에서는 나무로 된 고추도 봤지. 어떤 사내놈보다 새끈하고 화끈하게 여자 맛도 봤지. 난 온 세상 전장을 누비는 식스팩, 털북숭이. 사격왕, 유격왕, 바다 사나이. 불가능 따윈 없어. 하늘도 바다도 두렵지 않아. 인생도 알만큼 알아. 강한 적은 소총으로 상대 안 하지. 온갖 트럭도 다 몰아봤지. 2륜, 4륜, 6륜 구동. 브레이크를 밟을 땐 크쉬크쉬 소릴 내는 괴물 차도 몰아봤지. 할 일은 화끈하게 몸 사리면 겁쟁이지. 난 연인, 난 용사. 난 UDT 네이비씰 다이버. 마시고 먹고 사랑하고 주둔지에서 여자 깨나 꼬셔봤지. 유감 있으면 덤벼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으니까. 건배~!!

*번역의 출처는 Google Play

 


몰입하거나 혹은 분노하거나

월드컵, 총성없는 전쟁

월드컵은 4년에 한 번 씩 돌아오는 총성 없는 전쟁과도 같다. 그리고 그 전쟁은 약 7,000 제곱미터 남짓한 pitch 뿐만 아니라 그 밖에서도 벌어지는데, 무려 22억명(2010 남아공 월드컵 경기를 20분 이상 TV로 시청한 사람의 숫자. 출처 :  FIFA) 이 넘는 전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브랜드들의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대형 스포츠 이벤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스포츠 브랜드들은 월드컵 캠페인에 가히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시켜 왔으며, 2014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을 두 달 여 앞둔 지난 4월 1일, Nike 가 드디어 ‘Risk Everyhing’ 이라는 슬로건의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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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k Everything’ YouTube 영상 바로가기 (Click Here)

 

 ‘Risk Everything’, 1분 14초의 마법

이 캠페인의 메세지는 간결하다. 이번 월드컵에 출전하는 최고의 수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Cristiano Ronaldo, Wayne Rooney, Neymar Jr., 세 선수가 경기장으로 입장하기까지의 긴장된 발걸음을 담담히 담아내었을 뿐. 하지만, 이 1분 14초 길이의 캠페인 영상을 보기 전과 보고난 후 당신의 심장 박동 수는 분명 달라져 있을텐데, 그것은 바로 이 영상이 선수들과 팬들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팬들로 하여금 선수들이 느낄 중압감에 스스로를 이입시키게끔 정교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앵글은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고, 메트로놈처럼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시나브로 빨라져가고 있으며, 선수들이 용수철처럼 pitch 로 뛰쳐 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Pressure shapes legends. Risk everything.’ 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한다. 어떤가? 이 1분 14초의 짧은 경험동안 당신은 비판 어린 눈초리로 승리를 종용하는 극성맞은 팬에서 선수들의 중압감을 함께 짊어진 존재로 변모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Red Sun ~!!!

 

묘한 Contrast, 김연아와 대한민국

Nike 의 멋진 캠페인을 보면서 나의 뇌리 속에 비슷한듯 전혀 다른 한 편의 광고가 떠올랐다. 지난 Sochi 올림픽 때 국내 모 브랜드에서 전개했던 김연아 선수를 모델로 한 광고였는데, 이 광고는 팬들에게 엄청난 반감(관련 기사)을 불러일으킨 채 조기에 종료되고 말았다.

김연아

* 사진 출처 : Tistory blog

Nike 의 월드컵 캠페인과 마찬가지로 이 광고 역시 국가대표 선수로서의 책임감과 중압감을 담아내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전문가들은 다양한 원인을 지적하고 있지만, 결국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메세지가 팬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로 수렴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런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과연 그 이유가 전부일까?

 

인칭과 시점의 문제

모든 이야기에는 ‘인칭’ 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주지하다시피,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인칭’ 에 따라 서로 다른 느낌을 전달할 수 있으며, 적절한 ‘인칭’ 과 ‘시점’ 을 선택하는 것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Nike 의 캠페인은 전형적인 1인칭 시점의 이야기이다. 세 명의 수퍼스타들을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인 한 개인으로 치환시키기 위한 선택이리라. Nike 의 과거 캠페인, 예를 들어 Eric Cantona 가 등장하는 ‘Match in hell‘ 을 보면 이번 캠페인과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을텐데, 이것은 마치 ‘Dark Knight’ 전후의 ‘Batman’ 시리즈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가져다 주며, 이러한 1인칭 시점은 팬들로 하여금 수퍼스타와 수퍼히어로의 활약을 박수치며 응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내면으로 함께 침잠하는 경험을 가능케 한다. 또 한 가지 Nike 캠페인에 가산점을 주고 싶은 이유는 이 캠페인이 1인칭과 2인칭의 묘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다는 점인데,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카메라의 앵글들이 마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수퍼스타의 바로 옆에 서 있는 팀 동료로 느끼게 함으로써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전지적 시점의 나쁜 예

반면, 김연아 선수 광고의 경우 전형적인 전지적 시점을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신의 계시, 절대자의 목소리처럼 ‘너는 대한민국이다’ 라고 웅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점과 서술로 인해 보는 사람과 김연아 선수와의 거리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 이후, 김연아 선수의 복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고, 이런 어려움을 딛고 출전한 김연아 선수에게 많은 팬들이 안쓰러움과 미안함마저 갖고 있던 상황에서 전지적 시점을 채택한 것이 이 광고의 결정적 패착이 아니었다 싶다. (사실 최근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이런 전지적 시점의 접근이 역효과를 불어일으킨 경우는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최연혜 철도청장의 ‘어머니의 마음’ 발언인데, 이 발언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기는 커녕 대단히 월권적인 뉘앙스로 전달되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보다 분노를 초래한 바 있다.)

 

 광고와 컨텐트, 희미하지만 분명한 경계

‘광고보다 컨텐트’ 라는 것이 업계의 화두가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 둘 사이의 희미한 경계 어딘가 쯤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경계를 규정하는 수많은 기준들이 있겠지만, Nike 와 국내 모 브랜드의 사례를 나란히 놓고 보면서 결국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어디에 두게끔 하느냐가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저명한 협상전문가인 Jack Nasher 는 <Deal> 이라는 저서를 통해 ‘멋진 전지가위를 팔아요.’ 라고 말하기 보다는 ‘당신의 정원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있어요.’ 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 바 있다. 보는 사람과 이야기의 화자를 가깝고 나란히 둘 것인가, 혹은 더욱 멀리하여 소원하게 만들 것인가? 광고와 캠페인을 제작한다면 한 번 쯤 곱씹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