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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모난 돌의 레토릭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견한 바 있는 금융가이자 사상가인 나심 니콜 탈레브는 그의 탁월한 저서 <안티프라질(Antifragile)> 의 첫 장을 이렇게 썼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지지만 모닥불의 불씨는 되살아 난다(Wind extinguishes a candle and energizes fire).”

(번역서의 문장은 “바람은 촛불 하나는 꺼뜨리지만 모닥불은 살린다.” 이지만 ‘바람’ 보다 ‘불’ 이 주어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의역하였음.)

한편, 춘천시를 지역구를 하고 있는 국회의원 김진태는 지난 11월 12일, 광화문에 모인 백만 여 개의 촛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촛불은 촛불 일 뿐, 결국 바람이 불면 다 꺼지게 되어있다.”

김 의원의 눈에는 백 만 개의 촛불이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제각각의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나, 그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이 백 만 개의 촛불이 기실은 모닥불, 어쩌면 성난 들불과도 같은 것이며, 바람이 불면 그 불길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무 스스럼 없이 쓰는 속담 중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또한 돌 하나하나를 서로 상관없는 제각각의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 이롭게 쓰이는 돌 중에 모가 없는 돌이 어디 있던가? 내 가족의 고향인 제주도의 돌담들은 그 모진 바람에도 서로의 모를 맞대고 묵묵히 세월을 이겨내고 있지 않던가?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 또한 어찌 돌의 모가 없이 그 어마어마한 규모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을 것인가?

나는 김진태 의원의 촛불 발언,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표현은 이 땅의 주인들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사이의 끈끈한 연대를 폄훼하고 해체하려는 고약한 시도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왜 모가 나면 안된단 말인가? 나의 모와 너의 모가 서로 어깨를 맞대고 기댈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큰 가치들을 거뜬히 짊어질 수 있지 않은가? 그러한 우리의 모를 정으로 내리치고 기어이 깎아 내려는 시도를 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이며, 거센 민심의 들불을 연약한 촛불의 군집으로 애써 평가절하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속담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구글링을 해 보니, 이 속담이 일본의 것으로 소개된 저서를 본 트위터 사용자가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한 내용이 있는데, 국립국어원에서도 그 기원을 알기 어렵다고 답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분노의 질주> 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Fast & Furious> 시리즈 중 <도쿄 드리프트(Tokyo Draft)> 편에서 일본의 오랜 속담 중에 “튀어나온 못이 정을 맞는다(The nail that sticks out gets hammered).” 라는 표현이 있다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이 속담이 동북아 전체에 널리 통용되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또는 군부독재정권이 시민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이 몹쓸 속담이 한 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문장에 담긴 의도와 우리 사회에서의 쓰임새로 미루어보더라도 충분히 합리적인 추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수락연설을 통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변명으로 점철된 우리의 비겁한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는 사자후를 토한 바 있다. 나는 김진태 의원의 발언을 듣고 이 연설을 다시 떠올렸다. 하여, 나는 이렇게 말한다. “둥근 돌로 쌓은 담은 허물어진다.”고. “바람이 거세게 불수록 들불 또한 더욱 거세어 진다.” 고.


스시와 비즈니스

미슐랭 3스타에 빛나는 최고의 스시 셰프, 오노 지로(小野 二郎) 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Jiro Dream of Sushi> 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소개된다. 진행자가 지로 상에게 “셰프가 밥(샤리, 舎利)과 생선 등 재료(네타, )를 말아쥐는 퍼포먼스가 스시 전체의 공정 중에서 과대평가되는 것은 아닙니까?” 라고 다분히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의외로 지로 상이 환하게 웃으며 “흠… 일리있는 말입니다. 사실 스시의 90%는 이미 내가 손에 쥐기 전에 완성된 상태로 준비되지요.” 라고 답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스시는 한 마디로 음식의 생태계 전체가 하나로 응축된 메타포어 그 자체이다. 지로 상과 같은 최고의 쇼쿠닌(人) 이 빚어내는 극상의 맛은 천의무봉의 경지에 이른 스시 쥐는 솜씨는 물론이거니와 최고의 재료공급상들과 수십년에 걸쳐 쌓아온 돈독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로 상에게 쌀을 공급하는 생산자는 일본 최고의 특급호텔들의 러브콜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쌀을 줘 봐야 호텔의 요리사들이 지로 상만큼 그 쌀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익의 흐름으로 연결된 공급망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일 수 있으나 이처럼 확고한 신뢰에 기반한 파트너십은 환경의 변화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으며, 바로 그 이유 덕분에 지로 상과 같은 셰프가 수십년에 걸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관계로 똘똘 뭉친 곳이 바로 긴자(座) 상권과 츠키지(地) 시장이다. 츠키지에 모인 최고의 재료공급상들은 매일 아침 긴자에서 손수 재료를 구입하러 오는 최고의 셰프들을 만난다. 최고의 투자자들과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교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담이지만, 서울에서 본인의 이름을 걸고 스시야를 운영 중인 일본인 셰프에게 어떤 손님이 “도쿄 출장길에 긴자에 가려고 하는데 맛있는 음식점을 추천해 주세요.” 라고 했더니 그 셰프가 “긴자에서는 어딜 가든 기본적으로 맛있습니다.” 라고 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긴자에 있는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수련한 요리사가 독립을 할 때에는 스승이 있는 긴자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출발하게 되고, 경륜과 평판을 쌓아감에 따라 점점 긴자에 가깝게 매장을 이전해 가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에 긴자에 입성한 것 자체가 하나의 보증수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긴자의 턱 밑에 츠키지 시장이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비즈니스에 있어 구매자, 즉 돈을 지불하는 측이 우월적 지위 – 한국식 표현으로 ‘갑(甲)’ – 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은 기실 교환의 매개이자 가치산정의 척도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지불한 기업이나 개인은 반대급부로 그에 상응하는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지불한 금액 이상의 가치와 효용을 누릴 수도 있다. 또한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현명하게 소비하면 공급자는 구매자를 존중하게 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장기적인 신뢰를 제공할 수도 있다. 특급호텔의 자본력으로도 뚫을 수 없는 지로상과 쌀 생산자 사이의 신뢰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 신뢰의 가치를 모르고서 ‘내가 돈을 지불하니 내가 곧 왕이다’ 라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비즈니스에 있어 극히 근시안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그 효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구매에 있어 이러한 근시안적 행태는 가히 치명적이다. 100 을 주고 50 의 효용 밖에 얻지 못할 수도 있고, 150을 주고 300의 효용을 얻을 수도 있다. 쌀을 어떻게 다뤄야 제대로 밥맛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싸게 샀다고 좋아해 본들 무슨 소용일까?

최고의 스시가 신뢰와 존중이라는 비옥한 토양을 갖춘 생태계에서 비롯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비즈니스의 원리도 스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최고의 결과물을 내고자 한다면 생산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기본이다. ‘돈을 주고 산다’ 라는 개념 대신 ‘가치를 교환한다’ 라는 인식, ‘가성비’라는 영악한 표현 대신 ‘제 값을 치뤘다’ 는 공정한 만족감이 우리나라의 산업 전반에도 널리 확산되었으면 한다. 오마카세 스시 한 끼를 먹든, 대규모의 부품이나 솔루션을 구매하든 그 본질은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프로듀스 101과 한국형 알파고

 

순위사회.

나는 작금의 대한민국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양성의 가치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획일적인 잣대로 줄을 세우는 문화. 사람들이 가장 즐겨보는 온라인 컨텐츠 중 하나가 소위 ‘실급검’, 즉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라는 것인데 내가 필요한 것을 잘 찾아주면 그 뿐일 검색서비스를 통해 남들이 무엇을 찾아보는지 순위까지 매겨가며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심리에 기인한 것일까? YouTube 를 위시한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이나 Spotify 같은 온라인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만 하더라도 개인의 취향에 최적화된 추천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운영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차트와 서비스 제공자의 획일적인 큐레이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순위, 그리고 그 순위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묵시적인 불안감. 굳이 잔혹하기 그지 없는 입시 경쟁까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점입가경의 한 단면은 매스미디어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최근 큰 화제와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 의 포맷을 보면 그야말로 이러한 ‘순위사회’의 축소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101명의 연습생들이 등장하는 그 스케일만으로도 아연실색하게 되는데, 이렇게 많은 연습생들이 가진 다양한 재능들에 순위를 매기고 줄을 세워 탈락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적자생존의 이 포맷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며, ‘pick me’ 를 외치는 연습생들에게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아가 투영되었기 때문에 높은 인기를 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씁쓸한 기운마저 든다.

한편, 지난 3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지능정보사회 민관합동 간담회> 에서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지능정보산업 발전 전략’ 을 통해 우리나라의 AI 산업을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관련 기사). 이 발표에서도 순위사회의 한 단면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언어지능을 비롯한 총 5개의 분야에서 2019~2020년까지 세계 1위에 오르거나 시연에 성공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용수 미래창조과학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은 이 목표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왜 이것을 하느냐면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답을 한 바 있고(관련 기사), 정책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본다. 하지만, AI 처럼 도전적인 과제는 그에 걸맞는 문제정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단언컨대 ‘살아남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1등을 하기 위해’ 라는 동기는 ‘인류가 당면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동기에 비한다면 미약하기 그지 없는 수준의 것이다.

지난 해, Google 의 Head of Innovation 을 맡고 있는 Frederik R. Pferdt 가 서울디지털포럼(관련 동영상) 참석 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 기업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때 Frederik 은 그 기업의 임원들에게 Google 의 사명(Mission)인 ‘organize the world’s information and make it universally accessible and useful’ 를 소개하면서 ‘지속적으로 추구 가능한 사명을 세우고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그 사명을 실천할 때 그 기업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반면, ‘세계 1위’, ‘시장점유율 1위’ 와 같은 목표는 언젠가 달성 가능한 하나의 성과측정기준일 뿐이며 이런 것들은 결코 구성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없다는 견해 또한 피력한 바 있다. 나 역시 이러한 목표는 고객중심적이지도 않고 목적지향적이지도 않다는 점에서 그저 경영자들의 근시안적 이해관계를 위해 기업의 자원을 결집하기 위한 생경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앞선 포스팅 – 구글의 리더쉽 – 에서 Google 의 CEO 인 Sundar Pitchai 와 DeepMind 의 CEO 인 Demis Hassabis 는 CNN 공동기고문(원문 보기)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음을 소개한 바 있다.

현재 세계가 마주한 도전과제는 ‘인간’ 대 ‘기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도구’ 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다. 기후변화, 의료 보건, 교육 등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슈들이 있고, 수천 명의 전문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들은 이러한 전문가들에게 강력한 문제 해결 도구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긴급한 글로벌 이슈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머신러닝을 활용하여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 또 한 명의 위대한 기업가인 Tesla 의 Elon Musk 는 Tesla 의 배터리인 Powerwall 을 발표하는 프리젠테이션(관련 동영상)의 첫 장을 화석연료가 환경에 미치는 해악을 경고하는 데 할애한 바 있다.

1ap5uyou3xpshab8erstvrq<Source : https://medium.com/firm-narrative/>

  Elon Musk 는 이 Powerwall 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세계 1위의 배터리 업체가 되겠다’ 와 같은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인류를 둘러싼 심각한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Tesla 가 가진 기술을 통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의 공감을 유도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접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과학자들 중 과연 누가 ‘세계 1등이 되겠다’ 는 목표와 동기에 의해 움직였던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정의하고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평생을 다 바쳤을 때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우리 사회는 이처럼 단순명료한 진리를 놓친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1등을 하기 위해 장미빛 청사진을 그리고 ‘pick me’ 를 외친다.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 있어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이다. 알파고가 보여주었듯 최적의 의사결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어쩌면 기계와 AI의 몫이 될지도 모른다. 101명의 연습생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인기를 끌 수 있을지 분석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은 단언컨대 그 어떤 전문가보다 기계가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못 믿겠다고? 이것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New York Times 에서는 2013년 <Solving Equation of a Hit Film Script, With Data> 라는 기사(원문 링크)를 통해 데이터에 기반한 대본분석가들이 흥행을 위해 가감해야 할 요소들을 조언해 주고 있음을 소개한 바 있다. 이것조차 와 닿지 않는다면 Brad Pitt 주연의 영화 혹은 책 <Money ball> 을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한편, 우리를 둘러싼 문제를 정의하고 어떤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를 설계하는 능력은 여전히 그리고 고스란히 우리들 사피엔스의 몫이다. 국가의 백년지대계 과학정책이든, 기업이 사업을 영위하는 일이든, 차세대 스타를 발굴하는 일이든, 우리가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 올바르게 정의하는 일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해 졌다. 올바른 문제정의는 구성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의 도구들을 목적적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프로듀스 101 에서 유추할 수 있는 순위사회의 토대 위에 한국형 알파고가 꽃을 피우기 요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글의 리더쉽

알파고와 이세돌9단의 역사적인 대국이 모두 끝난 후, 세간의 관심은 ‘Google’ 이라는 회사에 집중되었다. 내일이면 필자가 구글에 합류한지 정확히 3년이 되는데, 그동안 구글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은 적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딜 가나 이 회사에 대한 설왕설래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많은 분들께서 구글의 앞선 기술과 그로 인한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럴수록 이 놀라운 회사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써 자세를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대국은 필자에게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 역시 구글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 혹은 사피엔스로서 기술의 진보가 가져 올 미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난 번 포스팅 – 알파고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을 통해 혁신적인 기업과 기업가들이 선의를 잃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이번 포스팅을 통해서는 현 시점에서 가장 큰 기술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업 중 하나인 구글의 구성원으로서 구글의 리더쉽에 여전한 기대와 신뢰를 견지하는 개인적인 이유들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단, 내부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자세히 공유할 수 없음은 독자 여러분들께 널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먼저 이번 대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많은 언론들이 이번 대국의 프레임을 ‘인간 vs 기계’ 로 정의하고, 알파고의 승리를 인간에 대한 위협, 특히 대규모 실업을 초래할 수 있는 실체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한 우려가 전혀 근거없거나 혹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구글의 엔지니어들, 특히 리더들의 시각과는 적지않은 간극이 있음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구글의 CEO 인 Sundar Pitchai 와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의 CEO 인 Demis Hassabis 는 CNN 에 공동기고한 글(원문 보기)을 통해 이번 대국을 ‘인간 vs 기계’ 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 그렇다면, 알파고의 승리가 곧 인간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가? 인간의 독창적 전략을 필요로 하는 대표적인 게임인 바둑에서조차 컴퓨터가 인간을 이긴다면 그것이 결국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현재 세계가 마주한 도전과제는 ‘인간’ 대 ‘기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도구’ 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다. 기후변화, 의료 보건, 교육 등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슈들이 있고, 수천 명의 전문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들은 이러한 전문가들에게 강력한 문제 해결 도구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긴급한 글로벌 이슈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머신러닝을 활용하여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이 점점 스마트해지고 다재다능해짐에 따라, 우리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글로벌 도전과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는 생각을 이제 버려야 한다. 이제 더 큰 목표를 세워야 한다.”

내가 구글의 두 창업자를 비롯한 리더들에 대해 갖고 있는 첫번째 확신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 에 대한 열망과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구글의 인사담당 부사장인 Laszlo Bock 이 쓴 <Google work rules(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 를 보면 Larry Page 와 Sergey Brin 의 성장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Larry 의 할아버지는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였다. Larry 는 할아버지가 연좌 파업을 하는 동안 회사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고 직접 만들어 갖고 다니셨던 커다란 쇠파이프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회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고 무기를 만들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은 얼마나 많이 좋아졌으며, 리더로서 자신이 할 일은 모든 구글러들이 각자 가치있는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피력한 바 있다. 한편 Sergey 의 부모는 두 분 모두 수학자였는데, 1979년에 자식의 미래와 자유를 위해 반(反) 유대주의 공산정권인 소련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바 있고, Sergey 는 자신의 반골 기질이 이러한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창업자들을 마냥 찬양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들이 자신의 성장배경과 과거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번 대국 기간 중 내한한 Eric Schmidt 회장이나 딥마인드의 Demis Hassabis 또한 머신러닝과 AI 를 통해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이 이세돌9단에게 거둔 네 번의 승리 못지 않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한 번의 패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 한 가지 구글의 리더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미덕은 ‘겸양(Humility)’ 이다. 이번 대국이 끝나고 이세돌 9단과 양손으로 허리 숙여 인사한 Sergey 의 사진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셨는데, 구글에서 생각하는 겸양의 개념은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Thomas Friedman 이 Laszlo Bock 부사장과의 인터뷰에 대해 New York Times 에 기고한 <How to get a job at Google?(원문 보기)>에 따르면 Laszlo 부사장은 겸양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책임감과 주인의식의 문제이다.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인의식을 갖고 앞으로 나서야 하지만, 동료의 더 나은 아이디어를 포용하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겸양의 미덕이다. 당신의 최종 목표는 결국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내 몫의 기여를 했다면 동료들의 아이디어를 위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겪은 구글의 리더들의 화법과 행동에서도 이런 겸양의 미덕을 확인할 수 있다. 구글의 리더들은 언제나 “What can I do for you?” 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근자에 구글 입사 후 가장 고위직 – 사실 이 표현도 구글에서는 좀체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 에 계신 분께 미팅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브리핑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도 그 분께서는 “내가 오늘 미팅 중에 너에게 어떤 도움을 주면 될까?” 라고 대화를 시작하셨고 그 미팅을 위해 내가 준비한 것의 200% 를 발휘해 주셨다. 직급을 막론하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이야말로 리더로서 실무진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Obama 대통령이 군사작전 중에 현장지휘관 옆에 놓인 접이식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진을 보았을 때와 거의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동료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자세에 더하여 Lazlo 부사장은 ‘지적 겸양(Intellectual Humility)’이라는 개념을 추가하고 있다. 지식 앞에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구글이 인재를 채용함에 있어 학벌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겸양에 있어서 또한 구글의 리더들은 훌륭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구글에서는 내부 교육의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이러한 교육에 강제로 참석할 것을 종용받아 본 적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이런 교육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리더들이라는 점이다. 구글에서 리더는 몰라도 되는 사소한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이라면 자발적으로 그것을 체득해야 하고 그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높은 직급의 구글러라 하더라도 겸손한 자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할진대, 구글의 창업자이자 세계 14위의 부호인 Sergey Brin 이 이세돌9단에게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악수를 한들 놀랄 일이 무엇이겠는가? Sergey 에게 이세돌9단은 지적인 겸양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지성일테니 말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열정, 그리고 동료와 지식 앞에서의 겸손함. 내가 구글에서 3년동안 일하면서 생생히 느껴 온 구글 리더십의 한 단면이다. 물론 구글도 완벽한 회사는 아니며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업자에서부터 대한민국 서울의 세일즈맨인 나에게 이르기까지 이러한 정신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구글이라는 회사의 큰 영향력을 감안할 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글을 바라보는 모든 분들께서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실 수는 없겠지만 이 글을 통해 구글의 리더십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편린이나마 공유할 수 있다면 이 글을 쓰는 수고로움이 헛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알파고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딥마인드의 알파고와 이세돌9단의 대국 1, 2차전이 세간의 예상(혹은 기대)과 달리 알파고의 두 차례 불계승으로 끝나자, 사람들은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인공지능이 초래할 변화에 대한 불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현대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전 인류가 사실상 하루하루 혁명적인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보니 어지간한 기술적 진보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인공지능’ 이라고 하는 기술만큼은 우리 모두가 걱정어린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SF영화에서 그려진 암울한 미래를 떠올리며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 것이나, 그 불안의 장막을 걷어내고 나아갈 길을 터주어야 할 의무를 지닌 지식인과 언론들 조차 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큰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알파고는 기계가 인류에게 보내는 선전포고일까?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기계에 종속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한 채 암울한 삶을 영위하게 될까? 나는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알파고와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앞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느끼는 이 충격과 공포가 어디에 뿌리를 내린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해 보고, 알파고와 인공지능을 어떤 자세로 마주해야 할 지 추스르는 일이다.

알파고, 혹은 알파고의 승리에 대해 충격을 넘어선 적개심을 드러내는 분들도 많이 계셨고, 이런 분들의 반응은 19세기 초, 방직기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운동이었던 ‘러다이트(Luddite)’ 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러다이트 시대와 같이 지금 당장 인공지능으로 인한 대규모의 실업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자동화는 필연적으로 일자리 공급을 줄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많은 분들이 우려를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과거의 자동화가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위협을 가져다 주었다면,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은 지금까지 자동화의 사각지대에 있던 전문사무직 노동자, 즉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으로 하여금 미래의 일자리에 대한 우려를 갖게 한다. 이미 간단한 사무자동화는 일상이 되었지만 그동안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전략적 의사결정’ 또한 기계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되었다는 것을 알파고가 보여줌으로써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들로 하여금 큰 우려를 불어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내 주변 반응만으로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일이나,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내 친척분들에게는 알파고의 승리가 그저 흥미로운 가쉽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서울에서 전문적인 영역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에게는 이것이 실재하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의 우려가 과연 알파고를 비롯한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에만 기인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new normal’ 로 규정되는 작금의 경제상황 하에서 이미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은 취약한 구조에 내 몰리고 있다. (그 밖의 계층이 안전하는 뜻은 절대 아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던 고임금 화이트칼라 계층마저 이제는 안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썼음을 분명히 한다.)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선망하는 전문직, 혹은 대기업 종사자들끼리 주고 받는 카카오톡의 그룹메세지 속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특정 기업의 구조조정 계획들이 공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해고와 임금피크제를 노조의 동의없이 시행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연금제도 등 노후를 보장할 사회안전망은 불안하기 그지 없고 개인적으로 미래를 대비하기엔 주택, 육아, 교육 등에 당장 지출해야 할 비용이 너무나 크다. 이러한 경제상황 하에서 나타난 알파고의 존재는 마치 도화선과도 같이 사람들의 우려에 불을 붙였고 이로 인해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논의의 기회는 애초부터 상실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국에 있어 이세돌9단에게 한국사회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면 알파고에게는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위협들을 뭉뚱그려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이분법이 이번 대국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염려스럽다.

실업에 대한 위협보다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충격의 근원은 ‘무지에 대한 거부 반응’ 이다. 이번 대국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설은 그야말로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19*19 에 이르는 바둑판 위에 펼쳐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 수 보다도 많다고 하면서도 정작 알파고가 두는 수에 대해서는 ‘충격적이다’ 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 수 보다도 많은 경우의 수 속에서 그동안 인간이 두어 온 한 줌 모래와도 같은 수들을 놓고 ‘정석’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닐까?  인간 전문가들이 파악해 온 그야말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한 채로 이 대국을 받아들인다면 매 순간이 충격의 연속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둑의 세계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광대한 것이라면 도대체 놀랄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지점에서 나심 탈렙의 ‘검은 백조(black swan)’ 과 얼마 전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의 ‘반서재(anti-library)’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검은 백조(black swan)’. 얼핏 모순형용 같지만, 실제로 검은 백조는 존재한다. 그런데 조류학자들은 왜 ‘백조’ 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검은색의 백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것, 다시 말해 무지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나타났을 때 감내하기 어려운 큰 충격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그 복잡도가 극도로 높아진 현대 사회에 있어 변화와 충격을 초래하는 것은 대부분 이 ‘검은 백조’ 현상들이라는 점이다. 월가의 현자들 중 몇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예측했으며, 그 누가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대비하자는 주장을 실행에 옮겼는지 생각해 보면 그 답은 자명하다.

알파고는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무지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완벽하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최근작 <사피엔스> 에서 서양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제국으로서의 주도권을 쥐게 된 요인 중 하나로 ‘무지에 대한 인정’ 을 꼽은 바 있다. 대항해 시대 당시 유럽에서 발행된 세계지도에는 공백으로 남겨진 부분이 많았고 이것은 곧 유럽인들이 미지의 대륙에 대한 존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에 반해 중국과 동양의 지도는 중화사상을 반영한 완전무결한 형태로 그려져 있고 신대륙을 위한 공간 따위는 남겨져 있지 않다. 딥마인드 팀에게는 이세돌9단을 비롯한 인간계 초고수들이 두어온 바둑, 그 여백이 엄청나게 크게 보일 것이고, 알파고의 한 수 한 수에 충격을 받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세돌9단의 바둑이 전부인 양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나는 바로 그것이 동일한 현상에 대한 양극단의 반응을 설명하는 단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알파고와 인공지능에 대한 충격과 공포의 근원을 짚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해 볼 차례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숙제이지만,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 즉 사피엔스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대해서는 나 역시 유발 하라리의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다만 조선일보에서 유발 하라리와의 인터뷰 헤드라인을 “2100년이면 현생 인류 사라질 것… 알파고가 그 신호탄” 라고 쓴 것을 보았는데(기사보기), 이것은 유발 하라리의 견해를 곡해하기에 딱 좋은 표현이다. 유발 하라리는 결코 현생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현생 인류, 즉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사피엔스가 기술의 발전에 힙입어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피엔스는 장기 및 신체기관 이식, 증강현실 등에 힘입어 지금에 비해 훨씬 더 큰 능력을 가진 존재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망은 본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트위터를 가리켜 ‘외뇌(外腦)’ 라고 표현한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이미 사피엔스는 인터넷과 각종 도구들에 힘입어 과거 우리의 조상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알파고의 등장에 우려를 표하는 고임금 화이트컬러 계층들이 많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는데, 이미 그 계층들은 상당 부분 인터넷을 비롯한 기술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확률과 통계에 대한 책 한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에 대해 논할 수가 있었겠는가?) 다만 앞으로는 이러한 도구들과 사피엔스의 결합이 한층 더 강화되고 그 활용도 또한 높아짐으로써 새로운 단계, 다시 말해 ‘진화’라 부를 만한 단계로 진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처럼 다가 올 미래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큰 폭의 변화를 수반하리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런 만큼 이에 대한 대비 또한 범국가적, 아니 전지구적인 협력에 기초해야 한다. 만일 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간이 육체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혜택은 모든 인간들에게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특정기업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이윤을 나누지 않고 독점한다면 기술의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한 형태의 독점은 결국 공멸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 시대의 현자들, 특히 혁신적인 기업가들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Google 의 두 창업자가 창업 후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Don’t be evil.’ 을 강조하는 것은 단지 이것이 미사여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곧 플랫폼 기업, 어쩌면 모든 기업의 생존법칙이라는 것을 뼛 속까지 이해하고 있는 덕분이다. 결국 세상이 선의로 작동할 수 있다는 믿음은 – 비록 나는 애덤 스미스를 배운 경제학도이지만 –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신념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나 역시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세돌9단과 알파고 간의 세 번 째 대국이 진행 중이다. 나는 알파고의 3:2 우세를 예상했고, 알파고가 첫 대국을 이긴다면 5:0 승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오늘 대국은 이세돌9단의 승리를 바란다. 이세돌9단이 나와 같은 사피엔스라서가 아니라, 이세돌9단이 나의 무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가득찬 흥미로운 곳임을 깨닫게 해 주길 바란다. 이세돌9단의 건승을 빈다.

 

 

 


움베르토 에코를 기리며

Mobile World Congress 2016 참석 차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2월 19일.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는 스페인어 – 어쩌면 까딸루냐어였을지 모를 –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페인어 초급 강좌만 두 어 번 들었던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기에 ‘아, 바르셀로나에 잘 도착했구나’ 하는 신호 정도로 흘려 듣던 찰나, 문득 ‘움베르토 에코’ 라는 선명한 이름이 귀를 울렸다. 잠시 후 검색을 통해 확인한 것은 안타깝게도 그의 부고였다.

당대의 기호학자이자 세계적인 작가였던 그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제기했던 ‘반서재(Antilibrary)’ 의 개념은 나심 니콜 탈렙이 주창한 ‘안티프래질(Antifragile)’ 과 함께 지식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책, 다시 말해 지식을 마치 지키고 아껴야 할 자산처럼 여기는 태도를 180도 뒤집어 그 여집합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무지의 가능성을 열어두게끔 하는 그의 시각은 단순명료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유용한 개념이라면 응당 그러하듯.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유럽이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아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움베르토 에코가 읽었다면 박수를 쳤을 법한 해석을 내 놓았다. 15,6 세기 동양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는 비어있는 미지의 지역이 없었던 반면, 동시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역에 대한 공백이 분명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유럽인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지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유럽이 위험을 감수하고 대양을 건널 수 있었던 근원적인 동기라는 유발 하라리의 지적에 나 또한 깊이 공감하고 있다. 도도한 역사가 이러할진대 한낱 개인의 삶에 있어서 무지에 대한 자각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런지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로 출장와 있는 동안, 그 대륙의 반대편 동쪽 끝에 있는 한반도의 내 나라에서는 ‘테러방지법’ 이라는 이름의 위세도 당당한 법 앞에 야당의원들이 장시간 릴레이 토론으로 맞서는 소위 ‘필리버스터’ 가 펼쳐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이것은 정말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 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에 나는 묻고 싶다. 대통령의 단호한 지적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대통령의 서재는 빈 칸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빽빽하고 대단한 것인가? 설령 오랜 경륜으로 그 빈틈이 극히 좁다할지라도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자라면 의심과 회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숙명 아니던가? 나는 대통령의 분노 앞에 참담했다.

일주일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문물을 접하고, 제주에서 천 년을 버텨온 내 조상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국의 땅을 밟으면서 내 서재가 채워지는 것을 경계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이것을 다행히 여기는 것조차 경계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움베르토 에코는 반서재의 개념을 설파했지만 정작 그 개념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소중한 지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국회를 보라. 반서재 개념의 현신들이 웅변을 토하고 있지 않은가? 움베르토 에코의 명복을 빈다. 그대의 반서재에 영면하시길.

 


참을 수 없는 美食 의 가벼움

Mark Rothko 展 을 다녀왔다. 전시를 보기 전까지 나는 Mark Rothko 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인 몇 가지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사각의 프레임과 색상만으로 표현한 색면추상들을 통해 작가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Steve Jobs 가 생의 마지막에 그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다든지, 그의 작품이 1천억원을 호가한다든지 하는 사실은 그저 전시의 흥행을 위한 가쉽거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시의 동선은 작가의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모티브를 두었던 ‘신화의 시대(Age of Myth)’, Multiform 이라는 독특한 화풍을 통해 색면추상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던 ‘색상의 시대(Age of Colour)’,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꿈꿨던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 낸 ‘황금기(Golden Age)’ 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품 활동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 만한 많은 작품들이 서울을 찾은 것은 실로 행운이라 할 만 했는데, Mark Rothko 라는 작가가 반 세기 남짓한 활동으로 만들어 낸 Context 가 너무나 선명했던 덕분에 마지막으로 그의 무제(Untitled) 작품 앞에 섰을 때의 울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즐기고 그것으로부터 감동을 얻고자 한다면 무릇 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치 절대음감처럼 어떤 상황, 어떤 맥락에서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감동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절대적인 미감을 소유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도 하거니와 그런 사람조차도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그 대상을 관조한다면 분명 더 큰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리적인, 혹은 화학적인 특성을 측정하고 분석하는데 그치는 도구가 아니며, 총체적인 해석을 통해 기계가 이를 수 없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축복과도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탐닉하고 있는 식도락에 있어서도 나의 이러한 믿음은 확고하다.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 보자면, 많은 분들께서 블로그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하고 참고하는 소위 <OO 음식의 XX대 맛집> 과 같은 리스트들은 맛을 즐기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Context 를 결여하고 있는 반쪽 짜리 – 솔직한 심정으로는 반쪽에도 한참 못 미친다고 믿지만 – 정보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징기스칸의 몽고군처럼 소위 ‘맛집’ 이라고 하는 곳들을 질풍과도 같이 휩쓸고 다니면서 승리의 깃발을 꽂고 왕성한 정복욕을 자랑하는 이런 블로거들에게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미술 얘기로 잠시 돌아가자면, 전세계 미술관들을 누비며 경매가 Top 100 을 기록한 명작들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 한데 모은 것에 비교할 수 있겠다. 그런 사람들에게 훌륭한 비평을 기대할 수 없듯이 맛집들을 바삐 누비고 다는 이들의 혓바닥에도 특별한 감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수요미식회> 라는 TV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넘쳐나는 흥미 위주의 음식 관련 프로그램 중에서 차별화되는 포지셔닝을 염두에 둔 듯 한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결론은 이 프로그램이 TV버전의 <OO 음식 3대 맛집>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공유되는 포스팅들은 다수의 참여나마 수반되지만, 이 프로그램은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명성에 기대어 이런 류의 순위 매기기를 자행한다는 점에서 한층 더 처참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채널을 돌려 버렸던 장면은 ‘자장면’ 편 – 사실 이런 류의 기획에 왜 자장면, 떡볶이, 돈까스 같은 메뉴가 등장하는지 좀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메뉴들은 그저 기분에 따라 즐겁게 맛보면 될 뿐, 사실 ‘미식’을 논할 만한 여지가 많지 않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 에서 어느 중화요리집의 수타 자장면에 대해 황교익 씨와 김희철 씨가 전혀 다른 평을 할 때였다. 황교익 씨는 수타면의 굵기가 상당히 고른 편이라서 높게 평가한 반면, 김희철 씨는 굵기의 편차가 심할 정도로 커서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평을 내 놓았다. 같은 음식에 대해 상반된 경험을 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 못하고 갸우뚱 거리는 장면은 우습기 까지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의 단골도 아닌 사람들이 한 두 번 가 본 경험을 놓고 ‘미식’ 을 논하고 있으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사견임을 전제로, 황교익 씨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이 분께서는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메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전문적인 음식평론가로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해의 ‘깊이’와 ‘폭’ 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혔을 때, 그것은 오롯이 나만의 산 지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식문화는 지금 그 폭에 비해 깊이가 한없이 부족한 기형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유서깊은 Tailor’s shop 이 백화점이나 트렌디한 편집 매장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대를 이어 Tailor’s shop 을 찾는 손님들이 존재하는 덕분인데 이 손님들이 Tailor’s shop 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재단사와의 오랜 ‘관계’ 라고 할 수 있다. 식도락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요리사, 혹은 그 집의 주인과 얼마나 오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런 관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햇살 좋은 주말 오후에 즐겨찾는 음식점이 있다. 재료를 신선하게 쓰고 조리의 기본을 탄탄히 해서 좋아하는 곳인데, 얼마 전에 내가 좋아하던 Egg Benedict 가 메뉴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 아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다시 찾았더니 주문을 받는 직원분께서 이르기를, “지난 번에 Egg Benedict 가 메뉴에 없어서 아쉬워 하시는 것을 보고 다음에 오시면 꼭 해 드리도록 셰프님께 얘기해 놓았는데, 오늘 셰프님께서 몸이 안 좋아 결근하신 관계로 괜찮으시다면 디저트를 한 가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설령 디저트를 내어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단골의 반응을 기억하고 주방에 전달한 것만으로도 나는 이 직원분과 레스토랑에 기꺼이 박수를 쳐 드릴 수 있다. 그리고 단골에 대한 이런 수준의 배려가 존재하는 한 나는 이 레스토랑을 계속해서 찾을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은 경험들이 맥락을 이루어 이 곳에 대한 나의 만족을 배가 시켜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칼 대신 스마트폰을 든 맛집 정복자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인 경리단길 깊숙한 곳에 <한국술집 안씨막걸리> 가 있다. 원래도 좋은 전통술을 맛보고 싶을 때 종종 찾았었는데, 최근에는 훌륭한 셰프님이 합류하여 음식의 맛이 풍성해 졌다. 하루는 낙지요리를 맛있게 먹었는데 낙지도 훌륭했지만 같이 버무려진 무 생채가 아삭하니 아주 마음에 들었다. 흔하디 흔하게 맛 볼 수 있는 숨이 푹 죽은 무채와는 사뭇 다른 맛이었고, 셰프님께 맛있게 먹었다는 말씀을 전해 드렸다. 셰프님 또한 아삭한 무 생채를 좋아하신다며 다음에 오면 무 생채를 좀 더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런 교감으로 인해 나와 셰프님, 그리고 음식점 사이에 하나의 맥락이 형성될 수 있고, 이런 맥락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기회들로부터 타인의 경험에 의존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혀 끝의 즐거움이 배어나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언제나 요리사와 마주할 수 있는 주방 앞 자리 – 영어로는 bar, 일본어로는 だい(다이) – 이다. 내가 오랜 시간 즐겨찾는 음식점들 또한 이런 구조를 갖춘 곳들이 많다. 일식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어쩌면 이런 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요리사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무엇보다 음식의 맛을 배가시켜준다. 무릇 좋은 요리사라면 분명한 의도를 갖고 요리를 만들게 마련이고, 그 의도를 혀 끝만으로 파악하기엔 내 미각이 한없이 둔감할 뿐이다. 미술작품의 이해를 위해 도슨트가 존재하듯 음식을 마주할 때도 누군가의 설명이 더해진다면 맛을 즐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물며 요리를 만든 요리사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마치 작가 스스로 작품을 설명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일테니까.

새로운 맛집을 찾아가 보는 것도 적잖은 즐거움일 수 있다. 경험의 ‘폭’과 ‘깊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또한 개인의 성향에 따를 일이다. 하지만 음식을 앞에 두고 한 번 쯤 자문해 볼 필요는 있겠다. “내가 이 음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 혀 끝으로 이 음식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배를 채울 요량이라면 생략해도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그 음식으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던져 볼 질문이다. 질문을 던질 가치가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면, 음식점을 자주 찾아가서 다양한 맥락에서 음식을 맛보고 요리사 또는 주인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시나브로 이 질문들에 대해 ‘Yes’ 라고 답할 날이 올 것이고, 그 때의 즐거움은 결코 ‘Like’ 와 ‘Share’ 를 통해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감동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食道樂’ 이다.


법 앞에 불손한 사업자 VS 국민 앞에 불손한 법 – Uber X 서비스 중단에 부쳐

Uber X 가 한국에서 서비스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또한 프리미엄 옵션인 Uber Black 또한 현행법에 따라 그 대상을 제한적으로 운영한다고 Uber 측은 밝혔다. Uber 는 서비스 중단을 알리는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와 같은 결정은 우버가 한국에서 처해있는 규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한 의지의 표명이며, 한국의 이용자들과 파트너 운전자들, 그리고 지역사회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결정된 사안입니다.” (문법에 어긋남이 있어 뜻에 맞게 일부 수정함.)

이러한 辯 에 대해 혹자는 서울시 등 규제감독기관, 그리고 대한민국 현행법에 대한 불손한 태도라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가 하면, 혹자는 그동안 편리하게 이용해 왔던 서비스를 규제에 가로막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야말로 상반된 반응인 셈. 그렇다면 그 ‘현행법’ 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제1장. 제1조(목적) 이 법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에 관한 질서를 확립하고 여객의 원활한 운송과 여객자동차 운수사업의 종합적인 발달을 도모하여 공공복리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률의 세부적인 사항까지 따질 깜냥은 못되지만, 나는 Uber X 라는 서비스를 중단시키고, Uber Black 마저 극히 제한적인 형태로 축소시키버련 바로 그 ‘현행법’ 이라는 것의 목적을 보고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Uber 가 저 법의 목적에 반하는 서비스인가?

정부(국토교통부)나 지자체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관련 사업자에 대해 필수불가결한 자격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면허제도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특정 사업에 대해  면허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헌법적 가치인 선택의 자유에 대한 예외적인 사안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0년, 국민 대다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과외 등 사교육 금지’ 가 위헌 판결을 받은 것 또한 이 조치가 부모의 교육권과 과외 교사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법리에 따른 결과였다. 나는 택시사업자들의 면허가 승객들이 자유롭게 운송수단을 선택할 자유까지 침해해 가면서 지켜져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행 면허제도를 통해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의 목적인 운수사업의 종합적인 발달과 공공복리의 증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Uber 의 서비스에 만족하고 쌍수를 들어 반기는 다수의 승객들이 적지 않음을 볼 때, Uber 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들이 오히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부(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서비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법률의 제정 취지와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 국리민복 증진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Uber 의 확산에 대해 택시기사들의 생계와 처우를 걱정하는 시선도 많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현행법률이 과연 대표적인 서민계층인 택시기사들의 처우를 증진시켜 왔는가? 나는 경쟁이 부재한 상태에서 면허제도를 통해 기존사업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업주들의 배를 불려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두 업종이 바로 이 택시사업, 그리고 폭행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국민의 경악을 불러일으킨 어린이집 사업인데, 이 두 사업의 공통점이 바로 사업자의 면허취득기준은 높은 반면 종사자의 자격취득은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의 이준구 교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효율임금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바 있는데(효율임금이론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집 사건-이준구), 1년 남짓한 교육을 통해 자격을 취득한 보육교사들이 평균 130만원 내외의 월 급여로 매일 10시간 이상의 격무를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보육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지 않는가 하는 의견을 피력하신 바 있다. 나는 택시사업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쉽게 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그 처우는 열악한데 어떻게 좋은 서비스를 기대하겠는가? 그런 반면 기존 택시사업자들의 면허는 Uber 와 같은 새로운 도전자들의 위협으로부터 현행법으로 강력하게 보호받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다소 격한 표현일지 모르나, Uber 에 대한 택시기사님들의 분노와 적개심 뒤에 숨어서 웃고 있을 사람들은 다름 아닌 택시사업체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나는 정부(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입법이나 개정을 통해서라도 Uber X 그리고 Uber Black 의 운행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방향이 헌법적 가치인 선택의 자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행법인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의 목적에도 부합한다고 믿는다. 만일 정부(국토교통부)나 서울시가 Uber 의 자격에 일부 미비한 것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부분적으로 그 보완을 요구하면 될 일이다. 이마저도 Uber 가 거부한다면 그들에게도 더 이상 명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 인한 피해가 예상되는 택시사업자, 그리고 수많은 택시기사들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솔직히 말해 나는 Uber 의 진출이 택시사업자들의 매출과 이익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서울의 택시들이 승차거부를 해 가며 승객들을 입맛대로 골라태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단편적인 현상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나는 승객의 한 사람으로써 지난 십 수년 간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서울의 택시 서비스가 공급과잉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Uber 의 차량 운행대수는 얼마나 될까? 이 data 가 궁금했지만 검색만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평소 내가 Uber 를 이용할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Map 위에 등장하는 차량의 댓수는 언제나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내 짐작으로 Uber 의 시장점유율은 백분율로 볼 때 소수점 단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다른 시장으로 잠시 시선을 옮겨, 최근 수입맥주가 시장에서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대부분의 보도자료를 보면 대형마트에서의 수입맥주 점유율이 30% 대에 육박하고 있다는 내용이며 전체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아직 한 자리 수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형마트보다 훨씬 큰 요식업체 시장에서 여전히 국산맥주들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이처럼 같은 제품군 안에서도 다양한 시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종종 망각하곤 한다. 나는 Uber 정도의 서비스가 서울과 같은 Megacity 에 들어온다고 해서 단기간에 기존 택시업계를 고사시킬 정도의 충격을 줄 것이라곤 믿지 않는다. 또한 Uber 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의 충격을 받고서도 기존 택시업계가 스스로를 혁신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Uber 의 어마어마한 시장가치 등을 내세워서 마치 이 회사가 기존 택시업계를 고사시킬 수 있는 공룡기업이라도 되는 양 묘사하는 기사와 글들에 강한 거부감이 드는 이유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예측도 없이 택시업계의 피해를 보전해 주자는 비생산적 논의 따위는 없어야 한다. 그보다는 기존 택시사업자들에 대한 보다 엄격한 평가를 통해 시장 진입과 퇴출을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다. Uber 가 보여주지 않았는가? 사용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평가가 얼마나 쉽고 편리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그 대신 택시기사들의 처우를 대폭 개선시키는 한편 그 자격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효율임금이론이 만능은 아니지만, 적어도 작금의 처우로는 택시기사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며, 개선된 처우와 함께 그에 걸맞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London 의 명물로 유명한 Black Cab 의 Driver 가 되기 위해서는 London 곳곳의 도로 정보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 해야한다고 한다. 나는 내가 탄 택시의 기사님께서 목적지까지 가장 빠른 경로로 숙련된 운전 실력을 발휘해서 친절하게 운행해 주신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정말이지 택시비를 낼 때마다 내가 왜 내 스마트폰의 네비게이션을 검색해서 직접 길을 설명하고, 욕설을 들어가며 급발진 급정거로 인한 차멀미를 경험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다. 나는 업무상 택시를 탈 일이 많은데 열 번 타면 예닐곱 번은 저런 경험을 하곤 한다. 지인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Uber X 를 타면 더 저렴한 요금으로도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있는데 말이다.

법은 사회적인 합의, 그 중에서도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합의이고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우선적으로 그 합의를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데 이견은 없다. 다만, 그 법이란 것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생각할 하등의 이유는 없으며, 그 제정 취지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면 정부와 관계 기관이 나서서 발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의무를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Uber X 서비스 중단에 즈음한 나의 바램은 법 앞에 불손한 사업자를 징벌하는 것에 앞서 국민에게 불편을 안겨주는 법률을 손보는 일이 먼저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소박한 바램이다.


대한민국에 드리워진 Gresham의 망령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영국의 경제학자 Thomas Gresham 에게는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그가 주창한 Gresham’s law 를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에 묘사하는데 어쭙잖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화폐금융론 등의 경제학 과목에서 화폐의 역사를 공부할 때 꼭 등장하는 법칙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이 바로 Gresham’s law 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라는 문장으로 유명한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보관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화폐의 특성상 좋은 돈, 즉 주화의 원재료인 금과 은 등의 함량이 높은 돈은 금고에 쌓이게 되는 반면, 나쁜 돈, 즉 원재료의 함량이 낮은 돈만 주로 유통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법정통화, 즉 중앙은행이 그 가치를 보장하는 현대의 화폐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주화 자체가 곧 가치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따라서 함량 미달의 주화가 통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부와 중앙은행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현대의 법정통화에는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지 모르나 내 소견으로는 빳빳한 새 지폐는 지갑 속에 아껴두고 쭈글쭈글한 헌 돈을 먼저 쓰는 것도 이 법칙이 사람들의 심리에 남겨 둔 흔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구축(驅逐)’ 이라는 한자어는 한시 바삐 폐기되어야 마땅할 듯 싶다. ‘몰아낼 구’ 에 ‘쫓을 축’ 이 더해진 조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좀체 쓰지 않는 표현이므로 그냥 쉽게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 로 쓰더라도 충분히 그 뜻이 통하지 않을까 싶다. 영어로도 ‘drive out’ 이라고 쓴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고 화폐시장을 잠식하게 되면 경제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신뢰(trust) 가 무너진다. 당신이 물건을 사고 팔 때 주고 받는 돈의 가치를 100%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떻게 거래가 성사될 수 있겠는가? 각자가 저마다의 저울을 짊어지고 다녀야 할테고 이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낭비를 초래하게 된다. 시장에 규율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면 아마 그 경제는 교환경제 이전의 자급자족 경제로 회귀할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이런 지경에 처해 있다. 문제는 이 Gresham 의 망령이 화폐가 아닌, 이 사회 전반에, 그것도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상권

신촌, 홍대, 가로수길, 경리단길. 밀레니엄 이후, 이 따분한 도시 서울에 그나마 빛과 소금 같은 활력을 불어넣었던 지역들이다. 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초기의 상인들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몰리면 몰릴수록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임대료가 오르면 오를수록 따분한 취향의 대형 자본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가던 경리단길의 한 술집에 앉아 맞은 편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시뻘건 간판을 보면 짜증마저 솟구친다. 대형 자본의 허접한 취향이 지역을 살리는 우아한 취향을 몰아내고 있다.

#2. 정치인들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사는 군부를 위시한 기득권층과 이에 맞서는 민주화세력 간의 충돌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기득권층에서는 끊임없이 그 권력을 세습하는 반면, 민주화세력은 새로운 세대에게 배턴을 물려줄 전략도 의지도 없이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다. 능력있는 젊은 인재들은 흐린 물에는 발조차 담그려 하질 않으니, 인사청문회장은 정화조가 되어가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지방자치제는 현대판 음서제로 썩어가고 있다. 대의를 책임질 깜냥이 안되는 얼치기 정치꾼들이 자격있는 새로운 세대를 몰아내고 있다.

#3. 정명훈과 안현수

정명훈 씨는 한국 사회에 큰 빚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에스트로는 고국을 택했고 덕분에 우리는 훌륭한 음악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 역시 서울시향의 정기공연에서 훌륭한 무대에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러시아로 떠난 쇼트트랙 챔피언은 어떠한가? 본인은 애써 ‘그저 달리고 싶었다’ 라고 말을 돌리지만 그 표정에 묻어나는 진심은 그의 말처럼 간단치 않았다. 천박하고 추악한 다툼들이 거장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있다.

이렇게 다 몰아내고 나면 과연 우리 앞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진심으로 걱정이 앞선다. 악화가 시장을 잠식하면 교환경제가 무너지고 자급자족경제로 회귀하게 되듯이, 우리도 각자도생의 처절한 사투에 임하게 되지 않을까? 정부가 할 일이 곧 악화를 가려내는 저울의 역할일진대, 내가 보기엔, 그리고 많은 분들의 생각에 비추어 보건대, 지금의 정부는 눈금이 없는 저울과도 같다. 뻔뻔하게 악화를 들이미는 무뢰배들이 판치는 꼴을 눈 뜨고 볼 생각을 하니 다가오는 2015년이 암담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말,

서두에 밝혔지만, 사실 Gresham’s law 는 보관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화폐의 특성에 기인한 법칙이다.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몰아낸다라는 무척 단순한 메세지 때문에 다른 현상에도 쉽게 빗대어 쓸 수 있는데, 나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이런 愚 를 범한 것에 대해 글을 읽는 분들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