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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온전함(Integrity)에 대하여

넷플릭스에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영화를 찾다가, 토르로 잘 알려진 크리스 헴스워스 주연의 <Extraction> 1,2편을 보게 되었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용병이 벌이는 무모한 구출작전이 그 내용인데, 크리스 헴스워스와 한 팀을 이루는 아랍계 여배우의 묘한 매력의 잔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여배우의 이름은, 골시프테 파라하니. 이란계 배우로써 자국의 여성인권에 대해 비판하다 입국을 금지당하고 지금은 프랑스에 거주하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다가,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작품을 발견하곤 곧바로 넷플릭스에서 찾아보았다. 운좋게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였는데, 그 제목은 <패터슨(Paterson)>. 이름부터가 예술가의 풍모를 잔뜩 풍기는 짐 자무쉬 감독의 2016년작으로, 골시프테 파라하니와 함께 아담 드라이버가 주연을 맡았다. 짐 자무쉬에 아담 드라이버라니, 이만하면 우연히 찾아본 영화 치고는 꽤 만족스럽지 않은가?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만족감은 발견의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예술작품을 비교한다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지만, 내 관점에서는 아담 드라이버의 또다른 대표작, <결혼이야기> 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줄 만 할 정도로 매우 감동적인 영화라 할만 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패터슨>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즈음, 최근에 본 또 다른 영화,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타르>가 오버랩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도 패터슨과 타르라는 두 인물의 삶이 완벽히 대척점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이 두 영화 속 인물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려 한다.

#시를 쓰는 어느 소도시의 버스운전사, 패터슨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의 작은 도시인 패터슨에서 버스를 운전하며 살아간다. 그는 버스 운전으로 생계를 꾸려가지만 그의 정체성은 버스 운전사가 아니라 시인이다. 그는 하루하루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도 비범한 시선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시상을 이끌어 낸다. 컵케이크 파티쉐와 컨트리 뮤지션을 꿈꾸는 아내와 매일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한 다음, 버스 운전석에서 잠시 시를 다듬고 나서 동료의 실없는 푸념을 들어준다. 낮에는 온종일 버스를 운전하며 승객들의 이런저런 대화들을 듣곤 하며, 퇴근한 뒤에는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함께 저녁을 먹고, 사랑스러운 불독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 동네 모퉁이의 어느 바에서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 패터슨의 하루 일과이다. 물론 틈 날 때마다 그는 시를 쓰고 다듬는다. 영화는 2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패터슨의 일주일을 담아내는데, 하루하루가 같은 듯 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같다. 패터슨의 일상은 얼핏 단조롭고 물질적으로 빈곤해 보이지만, 기실 모든 순간 모든 하루가 온전하며, 그 모든 것들은 오롯이 패터슨의 것이다.

#넘볼 수 없는 업적을 이룬,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 타르
타르는 미국 빅5 관현악단의 지휘자를 거쳐, 세계 최고 명성의 베를린 필하모닉 여성 지휘자를 맡고 있다. 음악계에서 여성들을 가로막던 유리천장을 스스로 깨부수고 있으며,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 또한 숨기지 않는다.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재단에도 참여하고 있고, 팬데믹 이후에 말러의 교향곡 5번 공연 실황을 녹음함으로써 역사에 한 획을 그으려 한다. 이렇듯 완벽해 보이는 삶을 구축한 타르는, 그가 가진 권력을 남용하여 젊은 음악인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괴롭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신세가 된다. 투명하리만치 단순한 패터슨의 삶과는 정반대로, 타르의 그것은 겉과 속이 전혀 다르다. 인터뷰에서 ‘나는 비평을 읽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정작 언론에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예민할 정도로 신경 쓰고, 여성음악인들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듯한 리더십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독보적인 지위를 지키기 위해 잔인하리만치 냉정한 행위를 일삼는다. 자신의 파트너인 샤론과 딸을 아끼는 듯 하다가도, 집을 비우고 멀리 출장을 떠나서는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샤론의 전화는 받지도 않는다. 사상누각, 또는 허상과도 같은 타르의 일상은 온전함과 거리가 멀다.

#정체성의 위기
‘가난하지만 자족하는 삶’과 ‘화려하지만 공허한 삶’의 고루한 대비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두 편의 영화, 그리고 패터슨과 타르라는 두 인물을 보면서 ‘내 삶을 얼마나 온전한가?’에 대해 자문해 보게 되었다. 나는 패터슨처럼 오롯이 나라는 ‘단독자(單獨者, der Einzelne)’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타르처럼 사회적 지위, 맥락, 관계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허상인가? 40대가 되면서 친구들과 몇 번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명함 속 회사, 직업, 직책, 직급, 하는 일 등, 소위 말하는 계급장 떼고 나면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같은 맥락에서,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일론 머스크는 ‘앞으로 AI와 자동화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게 되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재화가 풍부해 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걱정해야 할 것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과연 어디에서 정체성을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산업화 이후, 인간은 자신의 직업에서 정체성을 찾아왔는데, 앞으로는 어디에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자아성찰이 필요하다
헨리 키신저, 에릭 슈미트, 대니얼 허튼로커가 함께 쓴 <AI 이후의 세계>를 보면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정보에 맥락이 더해질 때 지식이 된다. 그리고 지식에 소신이 더해지면 지혜가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소신이 생기려면 홀로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용자에게 수천, 수만, 수억명의 의견을 쏟아부으며 혼자 있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면 용기가 위축된다. 용기는 소신을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하며, 특히 새로운 길, 그래서 대체로 외로운 길을 걸을 때 중요하다. 인간은 소신과 지혜를 갖출 때만 새로운 지평을 탐색할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는 지혜가 생길 여유가 없다. 디지털 세상에서 중시되는 덕목은 자아성찰이 아닌 타인의 인정이다. 그래서 디지털 세상은 이성이 의식의 요체라는 계몽주의의 명제를 위협한다.”

#일상의 온전함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패터슨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인정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시를 통해 세상과 교감하며, 어린 소녀가 들려준 자작시를 곱씹으며 다른 우주를 만난다.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사상누각을 불안하게 쌓아가던 타르와는 달리, 패터슨에게는 애초부터 무너질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패터슨은 온전히 패터슨이고, 그의 이름이 그가 평생 살아온 고향 도시인 패터슨과 같은 것은 짐작컨대 패터슨의 온전한 삶에 대한 짐 자무쉬 감독의 시적 표현이리라. 그렇다면 내 이름 석 자는 어떠한가. 어디까지가 사상누각이고 어디까지가 오롯이 내 것일까. 얼기설기 엮어온 관계, 커리어, 소비, 소셜미디어 계정, 이런 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내 삶과 일상은 얼마나 추레할까.

#온전한 삶을 위하여
사실 ‘온전하다’는 표현보다는 영어로 ‘Integrity’ 라고 쓰는 편이 더 적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진실하고, 그 자체로 완전하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인 상태.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까발려도 아무 거리낄 것이 없는 상태. 패터슨은 그런 상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타르는 까발리면 끝모르게 무너지는 사람이다. 내 일상에 있어 온전한 순간을 억지로라도 찾아보자면, 책을 읽고, 커피를 내리고, 사랑스러운 내 강아지와 산책하는 순간. 고향인 제주 남쪽 바다의 끝없는 수평선에 넋을 놓는 순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순간. 그리고 직업적으로 온전한 경험은, 별다른 수식어를 동원하지 않고 “저는 세탁을 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단순명료함을 바탕으로 동료들과 함께 하루하루 성장해 나아가는 것. 이런 온전한 순간들을 걷어내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훅 불면 날아가버릴, 별 의미없는 시간들의 더미가 아닐까 싶다. 감히 시인의 삶에 닿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내 삶이 조금은 더 온전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죽음’에 대한 소고(小考)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연휴는 그 날짜 수에 걸맞는 긴 호흡의 생각을 이어갈 수 있는 매우 드물고 소중한 기회이다. 게다가 미혼인 나는 명절에 챙겨야 할 가사(家事) 또한 많지 않은 덕분에 그 소중한 기회를 톡톡히 누릴 수 있어 언제나 만족스럽다. 이번 연휴에는 아래 소개할 두 편의 작품 덕분에 특별히 의미깊은 생각들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지라, 그 기억을 짧은 글로 남기고자 한다.

첫번째 생각 -<숨결이 바람될 때(When Breath Become Air)>,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 지음

긴 호흡으로 곱씹어야 할 생각의 단초를 끄집어 내는 데 있어 가장 좋은 수단은 역시나 ‘책’이다.  이번 연휴에 어머니를 모시고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긴 여유 속에 읽으려고 책장에 꽂아 두었던 <숨결이 바람될 때(When Breath Become Air)> 를 보스턴백 한 켠에 잊지 않고 챙겨 넣었다. 여행이 꼼꼼하고 알차게 준비되었을 때의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여정에 어울리는 책 한 권은 그 만족감에 있어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깃털 하나가 그려진 단촐한 이 책을 마주한 느낌이 바로 그러하였다.

나는 부산발 삿포로행 비행기 안, 홋카이도의 JR 기차, 그리고 오타루와 비에이의 료칸에서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눈으로 즈려 밟았다.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 라는 전도유망한 신경외과의가 불과 30대의 나이에 암에 걸려 투병하면서도 담담하게 혹은 치열하게 죽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 내려 간 이 책의 페이지를 나는 단 한 장도 허투루 넘겨버릴 수 없었다. 보편적인 인류애, 가족에 대한 헌신, 환자에 대한 사명감,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까지,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저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류의 양심을 벼리고 싶다’ 던 젊은 날의 저자는 ‘지금에 와서 내 영혼을 들여다 보니, 연장은 너무 약하고 불은 너무 뭉근해서 인류의 양심은 커녕 내 양심조차 벼리지 못했다’며 죽음 앞의 숙명적인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저자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품위있고 의연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남은 이들의 삶을 더욱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저자의 인격,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같은 평범한 사람조차도 결국은 죽음 앞에 패배로 끝맺을 것이 명백한 삶의 순간순간에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는 용기를 잠시나마 품게 만드는 것이다.

두번째 생각 –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Ken loach) 감독

연휴를 이틀 남기고 서울로 돌아와 렌즈에 담긴 어머니와의 추억을 정리하고 나서, 존경해 마지않는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를 감상했다. 2016년 깐느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이 명작에서 나는 켄 감독의 전작 <앤젤스 쉐어(The Angels’ Share)> 에서 웃으며 눈시울을 붉혔던 우화적 위트를 기대하였지만, 지난 4년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세상에 분노한 감독은 위트를 걷어내고 더욱 명징한 목소리로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묵묵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은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후, 당분간 일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얼토당토 않은 행정처리로 인해 질병수당 지급대상에서 제외된다. 이의제기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다니엘은 하는 수 없이 구직수당이라도 받기 위해 시늉에 불과한 구직활동을 계속하게 되지만, 정부의 허울좋은 의무조항들로 인해 다니엘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마저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스스로도 곤궁해 처한 다니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케이티와 그의 두 아이들을 마치 친가족처럼 돌본다. 다니엘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위는 다름 아닌 ‘시민의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가난 때문에 눈물 흘리는 케이티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라고 보듬는 다니엘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정부의 사회보장제도에는 결여된, 이웃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가득찬 것이었다. 다니엘은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책무를 다하고 자존감을 지키려 애썼지만 그의 심장은 결국 그의 몸을 지켜주지 못하고 만다.

한 편은 에세이고, 한 편은 영화이지만 <숨결이 바람될 때>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 는 죽음에 대한 시선을 묘하게 교차시키며 나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해 주었다. 한 개인이 죽음에 맞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어디까지 고양시킬 수 있는지, 반대로 한 사회가 죽음에 맞선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 추락시킬 수 있는지, 그 대척점을 잇기가 무척이나 힘겨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결국 죽음 앞에 패배한다는 사실이다. 전쟁에서의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전투에 임하여서는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 의 용기를 가질 만 하다. 그처럼 담담히 나아가다보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삶이란 애초부터 존재하는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되리라. 다만, 밤하늘의 별들과 같은 수많은 삶들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그 빛을 잃어야만 하는 참담한 상황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다. 다니엘의 삶은 폴의 그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다. 폴도 <나, 다니엘 블레이크> 를 보았다면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 믿는다.


[사피엔스] 7만년의 connecting dots.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 Steve Jobs

미래를 내다보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의미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뒤돌아 보았을 때 지나온 순간들이 어떤 의미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며, 따라서 굳은 신념과 믿음을 갖고 전진하라는 스티브 잡스의 조언은 인생을 살아가면 갈수록 더욱 절실히 와닿는 가르침이다. 개인의 삶이 그러할진대 인류의 역사, 더 나아가 생명의 역사, 우주의 역사 또한 중요한 순간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나름의 맥락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이처럼 담대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구하고자 하는 시도를 우리는 ‘빅히스토리(Big History)’ 라고 부른다. (‘빅히스토리(Big History)’ 에 대해서는 데이빗 크리스찬(David Christian) 의 TED speech 를 추천한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빅히스토리’ 의 연대기를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인류학’으로 구분 – 이것은 당연한 구분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고(물리학의 시작), 원자와 분자가 생겨났으며(화학의 시작), 생명체가 등장하고(생물학의 시작), 그 말미에 인류가 번성(인류학의 시작)했기 때문이다. – 하고, 그 중에서도 인류학, 특히 지금으로부터 약 7만년 전, 사피엔스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 지구로 번성하기 시작한 이후의 역사로 Zoom-in 해 들어갔다. 이 7만년의 ‘connecting dots’ 가 바로 그의 역작 <사피엔스(Sapiens)> 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대담하고 도발적이다. 제목부터 ‘인류(Mankind)’ 대신 ‘사피엔스(Sapiens)’ 라는 생물학상 종의 명칭을 내세움으로써 인류를 여타의 생물들과 다른 반열에 놓으려는 선입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기존의 인류학, 역사학들이 형성해 놓은 이 종에 대한 신화(myth)들을 과학의 힘을 빌어 냉철하게 도려내고 있다. 어쭙잖은 비유일지 모르나, 마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를 썼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느낌마저 든다. 또한 7만년의 긴 여정을 다루지만 핵심적인 dots 들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저자의 필치는 Zoom-in, Zoom-out 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초고성능 렌즈와 같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역작’ 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이유다.

 저자가 7만년을 약 600 페이지에 압축한 것을 조금 더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2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Homo) 속이 진화한 이후, 수많은 종들이 지구상에 나타났다. 20만년 전, 호모 속에 속한 수많은 종들 중에서 동아프리카에 출현한 사피엔스 종은 7만년 전, 언어를 사용하는 인지혁명을 통해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약 1만2천년 전에 진행된 농업혁명은 개체의 행복과는 무관하게 사피엔스 종의 번성을 빠르게 하였고, 이 종이 언어를 통해 창조해 낸 상상력의 산물인 돈, 제국, 종교는 널리 확산된 종의 통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피엔스가 전 지구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종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약 5백년전부터 우리는 가히 ‘과학혁명’ 이라 불릴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는 우리에게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다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아니 ‘사피엔스’ 라는 종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위와 같은 요약을 본 혹자는 ‘이것이 우리가 알던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그동안 우리 스스로, 즉 ‘인류’ 를 그 밖의 생명체들과 전혀 차별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던 근거없는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단지 하나의 종, ‘사피엔스’ 로서 어떻게 진화하고 번성해 왔는지를 냉정하게 되짚어 보는 데 있다. 바로 이렇게 생물학과 인류학(또는 역사학) 을 넘나들며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전제들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제국’의 본질에 대한 고찰,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 등을 다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오롯이 과학과 합리적 추론의 힘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책을 읽는 내내 지적인 흥분을 가라 앉히기 힘들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인류의 역사가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와 자존감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책을 통해 접한 사피엔스의 역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라는 개체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섬뜩하리만치 냉정하게 보여준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류의 진보라는 것의 실체가 개체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흐름이 아니었음을, 많은 우연이 개입되었지만 인류의 번성 또한 ‘사피엔스’ 라는 한 종의 번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그리고 마침내 이 ‘사피엔스’ 라는 종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깨달음으로써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된다. 먼 우주를 돌고 돌아 결국 집으로 되돌아 오게 되는 <인터스텔라> 의 여정과도 같은 책이다. 자신있게 일독을 권해 드린다.


Wireless Music System 의 신호탄, Naim Mu-so

워낙 훌륭한 gadget review 들이 많은지라 굳이 내 얕은 취향과 지식으로 사족을 달지 않는 편이지만, 최근에 구입한 Naim Mu-so 의 경우에는 주위에 눈독 들이고 계신 분들이 제법 계신지라 며칠 간의 느낌을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얼마 전까지 audioengine A2 (지금은 A2+ 가 시중에 판매 중이다.) 와 D1 (DAC : 디지털 소스를 아날로그로 변환해 주는 컨버터) 의 조합으로 Apple 의 Airplay 를 즐겨 이용해 왔는데, 이번에 집을 옮기게 되면서 새로운 옵션을 찾던 중 눈에 띈 것이 바로 Naim 의 Mu-so 라는 모델이었다.

(audioengine A2+ 와 D1. 개인적으로 이 정도 조합이면 디지털 음원을 데스크탑으로 즐기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기준은 단순했다. 첫째, 올인원 시스템일 것. 둘째, Apple 의 AirPlay 가 편리하게 지원될 것. 셋째, 거실을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출력과 음장. 넷째, 미니멀한 디자인. 다섯째, 음역대를 가리지 않는 균형감. (물론, 가격은 당연한 제약 요인이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이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모델은 흔치 않았다. B&W 의 Zeppelin 이나 Geneva Lab 의 Model L 정도가 간간히 눈에 밟혔었지만 iPhone 의 도킹 단자가 바뀌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조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찬연하게 빛나던 하나의 모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B&O 의 Beoplay A9 되시겠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디자인. 완벽하게 지원하는 AirPlay. 5개의 드라이버 유닛 – 쉽게 말해, 저 하나의 커버 안에 5개의 스피커가 들어있는 셈 – 에 총 480W의 출력. 유일한 흠이라면 339만원에 달하는 가격. 그런데 운 좋게도 중고나라에서 박스도 뜯지 않은 새 제품을 220만원에 판매하겠다는 분을 발견해서 구매하기로 약속까지 잡았는데 당일날 판매자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하는 봉변을 당했다. 원래 지인의 물건인데 지인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하지만 그리 머지않아 이렇게 상처입은 내 마음을 단숨에 치유해 준 귀인, 아니 귀 모델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Naim 의 Mu-so 였다. 사실 이전까지 내가 Naim 이라는 브랜드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창업자인 Julian Vereker 가 카 레이서 출신이며, 독학으로 음향기기 제작을 익혔다는 것, 그리고 Naim 이 Bentley 의 카 오디오를 만든다는 스토리 정도였다. 그런데 이 브랜드에서 지난 해 4월, 첫 번 째 Wireless music system 인 Mu-so 를 출시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Daddy Geek 의 Mu-so Unboxing 영상 in YouTube

나는 이 제품의 국내 출시 소식을 온라인을 통해 접하고서는 청음이 가능한 청담동의 소리샵 매장인 ‘셰에라자데’ 를 방문하였다. 최근 판매에 주력하고 있는 모델이라 그런지 청음실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고 나는 내 iPhone6 에 저장된 몇 가지의 음원으로 사운드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판매하시는 분께는 짐짓 고민하는 척 했으나 사실 나는 그 자리에서 구매를 결심하고 말았다. 사실 며칠 뒤에 영국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 현지에서 구매해 올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직접 들고 올 수고와 세금을 감안했을 때 국내에서 구매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던 지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Mu-so 에 대한 평은 전문가들의 review – 개인적으로 WIRED’s Top Picks from CES 2015 에 Mu-so 가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 에 맡기고 나는 내 기준과 경험에 비추어 이 제품에 대한 소감을 말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이 제품의 미덕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단연 ‘간결함’ 이라고 할 수 있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온전히 Wireless 로 음악을 즐기는 데에만 집중한 덕분에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적으로도 대단히 간결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전원 케이블만 잘라버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드웨어의 디자인은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다. 사실 웹상에서 이미지로만 보자면 별 매력없는 직육면체 스피커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실물의 소재감은 그 완성도가 상당하다. 이 제품이 iPhone 과의 조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Steve Jobs 마저도 흡족해 했을 디자인이라 할 만 하다. 또한 이 디자인은 단지 외관상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사용자의 경험마저도 우아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일주일 째 이 제품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피곤하거나 귀찮은 동작을 취해 본 적이 없다. 기능미 측면에서도 남다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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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hone 6 Space Grey 와는 마치 원래 한 쌍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

자, 다시 나의 구매 기준으로 돌아가 보자. 첫째, 올인원 시스템일 것. 이 제품은 Naim 에서 명명한 바와 같이 Wireless music system 이다. 즉, 소스 기기+앰프+스피커, 이 모두가 하나의 디바이스로 해결된다는 뜻이다. 사실 다양한 조합을 경험해 본 오디오 매니아가 아니고서야 소스 기기+앰프+스피커를 개별 조합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잘 완결되어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며, Naim 이 Bentley 의 카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축적한 노하우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둘째, Apple 의 AirPlay 가 편리하게 지원될 것.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연결이 쉽고 매끄러운 것은 물론, 디바이스의 콘트롤 패널, 리모컨은 물론 스마트폰의 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도 모든 콘트롤이 가능하다. AirPlay 뿐만 아니라 Bluetooth는 물론, UPnP에 Spotify 까지, 가히 모든 Wireless 음원을 매끄럽게 지원한다고 할 만 하다. 개인적으로는 AirPlay 이외에 인터넷 라디오도 즐겨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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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o 의 m.app 홈 화면. Apple App store 와 Google Play 모두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이 app 을 사용하면서 머지 않아 가정의 많은 디바이스들을 m.app 으로 콘트롤 하는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셋째, 거실을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출력과 음장. 유닛과 출력만으로 사운드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없지만, B&O Beoplay A9 과 비교해 보자면, 6개의 유닛에 450W 의 출력은 두 모델의 가격차(국내 공식가격 기준으로 140만원 차이) 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 모델이 AirPlay 등 Wireless 에 집중하고 있다보니 가끔 과거의 iPhone 도킹 스피커나 블루투스 스피커와 비교해서 성능이 어떠냐고 묻는 분들이 계신데, 사실 Beoplay A9 과 Mu-so 는 그러한 모델들과는 카테고리 자체가 다른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막귀’로 듣는다 하더라도 두 체급 사이의 사운드 격차는 양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어지간한 가정의 거실은 채우고도 남음이 있을 사운드이니 기존의 도킹 스피커는 잊으시길. (참고로 B&W 의 Zeppelin Air 가 150W, B&O 의 Beoplay A8 이 105W 의 출력을 보여준다.) 넷째, 미니멀한 디자인.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고, 이 모델의 미려함은 직접 보고 느끼시는 편이 낫다. 나는 셰에라자데에 진열되어 있던 스탠드까지 함께 구매했는데 TV 스탠드나 선반에 애매하게 얹어두는 것 보다는 별도의 스탠드와 함께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두는 편이 이 모델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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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음역대를 가리지 않는 균형감. 나는 비록 사운드나 오디오에 대해서 평을 할만한 경험이나 식견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장르의 음악을 가리지 않고 듣는 취향 때문에 치우침 없고 고른 소리를 들려주는 점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셰에라자데에서 청음했을 때 선택한 음원이 Kendrick Lamar 와 Keith Jarrett 이었는데 양쪽 모두 만족스러웠다. 오늘도 아침엔 Kasabian 을 듣고 저녁엔 Vivaldi, The four seasons, recomposed by Max Richter 를 들었다. 이 정도 스펙트럼이면 제법 괜찮지 않나 싶다.

종합적으로 만족스러운 제품인지라 결과적으로 호평일색의 review 를 남기게 되었지만, 일부러 흠을 잡고 싶어도 불만스러운 부분이 딱히 없으니 나로써도 어쩔 도리가 없다. 감히 예견하건대, 앞으로 Mu-so 를 신호탄으로 Wireless music system 라는 제품군에 새로운 도전자들이 속속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디지털을 단순히 아날로그에 비해 열등한 음원으로 치부하기에는 (CD 가 LP 에 대해 그러하였듯) 우린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까. 기왕에 올거라면 제대로 오는 것도 훌륭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Mu-so 가 바로 그런 제품이라고 생각한다.


Lone Survivor : 우리 사회의 명예율은 무엇인가?

 

전쟁은 하나의 분명한 장르를 형성할 만큼 영화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소재 (혹은 주제) 중 하나이다.  영화가 그 시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지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장르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인데, (미국의 관점에서) 피아와 선악의 구분이 명확했던 20세기의 작품들이 영웅담(<람보>, <코만도>)이나 정치적 메세지(<플래툰>, <지옥의 묵시록>)를 담아내는데 주력한 데 반해, 미국이 패권을 장악한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실화에 기반한 리얼리즘이 전쟁 영화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이라는 군사적 라이벌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세계의 경찰로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미국에 대한 경계와 우려의 시선들을 헐리우드 자본도 인지했기 때문일까? 이제 람보와 코만도의 작전수행권은 어벤저스에게 이양되었고, 주적은 공산세계 대신 외계인이나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악덕자본으로 바뀌었다. 결국 전쟁 영웅의 무용담이나 정치적 수사를 영화에 담아 낼 여지는 지극히 좁아졌고, 그 대신 헐리우드의 감독들은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미군이 개입하고 있는 현장으로 눈을 돌리기에 이르렀다.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이 아니라, 분쟁 지역에서의 국지전 양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거시적인 ‘전쟁(war)’ 영화의 자리를 미시적인 ‘전투(battle)’ 영화가 대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전투영화의 서막을 연 작품은 누가 뭐라해도 Ridley Scott 의 2001년 작 <Black Hawk Down> 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1993년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한 미군과 소말리아 민병대 간에 벌어진 전투를 다루고 있는데, 20세기의 전쟁영화들과는 달리 정치적 수사와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가전의 치열하고 처참한 상황에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앵글을 들이댔다는 점에서 전투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Black Hawk Down> 은 작금에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으로도 유명하다. Josh Hartnett, Eric Bana에 Ewan McGregor 까지. 게다가 OST 는 거장 Han Zimmer 가 맡았다.) 이렇게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Philadelphia Inquirer 紙 의 Mark Bowden 이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동명의 원작이 존재했기 때문인데, 이와 유사하게 전투의 세세한 부분까지 담아낸 원작에 기초한 또 한 편의 작품, <Lone Survivor> 가 지난 해 말 세상에 공개되었다.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된 실화에 기초하고 있고, 제목이 어느 정도 결과를 암시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스토리보다 묘사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는 점에서 다음 단락을 쓴다.)

<Lone Survivor> 는 2005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인 Zabul 에서 미군에 의해 전개된 Red wing 작전의 실화에 기초하여 만들어 졌다. 당시 미군은 걸프만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던 시기인지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진압을 위해 대규모 병력 투입 대신 요인 암살 위주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중 Osama bin Laden 의 측근 중 한 명인 Ahmad Shah 의 제거를 위해 전개된 작전이 바로 Red wing 이었다. 먼저 투입된 4명의 SEALs 정찰조가 잠복 중에 양치기들과 마주치게 되고 격론 끝에 교전수칙을 준수하여 이들을 풀어주지만 삽시간에 추격해 온 탈레반들의 공격에 맞서다 결국 Marcus Luttrell 하사를 제외한 3명이 전사하였고, 뿐만 아니라 이들을 구조하러 온 8명의 SEALs 대원들과 8명의 160th SOAR – ‘Night Stalkers’ 라고도 한다 – 들이 탄 Chinook 헬기마저 로켓포에 격추되어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전사자 중에는 한국계 James Suh 병장도 포함되어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만리타국에서 영면에 든 그의 명복을 빈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전투영화 중에서도 산악전의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메마른 바위가 곳곳에 드러난 험준한 지형 – 실제 촬영은 뉴멕시코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 에서의 전투 장면은 극도의 사실감을 성취하고 있으며, 특히 두 번에 걸친 절벽 다이빙 장면은 절묘한 앵글과 속도감으로 마치 내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전달한다. 이처럼 완성도 높은 표현만으로도 이 영화는 전투영화의 역사에 그 이름을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묘하게도 <최종병기 활> 을 떠올렸는데, 비록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장르로만 놓고 보자면 두 영화가 ‘산악전 영화’로 함께 엮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서사적인 부분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이 영화를 권해 드리고 싶다. 심지어 그 서사는 영화 중에는 등장하지 않고, 엔딩 크레딧에 이르러서야 그 실마리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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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wing 작전의 외로운 생존자(lone survivor)인 Marcus 는 한 부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 부족은 이방인인 Marcus 를 지켜주느라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큰 희생을 치르게 되는데,  그 부족이 목숨을 건 일전을 불사하며 이방인을 지켜준 것은 그들이 2천 여 년 동안 지켜 온 명예율(Code of honor)인 ‘Pashtunwali’ , 즉 적에게 쫓기는 사람은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지켜주어야 한다는 원칙과 전통 때문이었다. (사실 ‘Pashtunwali‘ 란 ‘Pashtun 사람들의 법’ 이라는, 훨씬 넓은 의미의 단어이다. 이 중에서 ‘hospitality’, 즉 손님들에 대한 차별없는 호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슬람의 관용을 생각한다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고백컨대, 엔딩 크레딧에 이 자막이 올라가기 전까지 나는 그 부족의 호의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저 대목도 실화일까? 재미를 위해 각색한 부분이 아닐까? 어떻게 생면부지의 미군을 위해 같은 종족과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일 수 있을까? 감독이 자막을 이용한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서사를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오랜 세월동안 살아남은 것에 대한 존중은 가벼이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물질이건 제도이건 혹은 정신이건,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낸 모든 것은 존중받을 마땅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위험에 처한 손님을 목숨 걸고 지켜주는 불문율을 2천년이 넘도록 명예롭게 지켜가는 마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난 4월의 참사를 겪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과연 우리 사회의 명예율은 무엇일까? 시대를 거슬러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의 명예율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존재하기나 하는걸까?

회의에 가득 찬 자문에 희망 섞인 답을 내 놓을 수 있기를. 우리 모두의 마음으로 그리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덧,

<Loan Survivor> 중 Patton 하사의 신고식에 등장하는 Speech. SEALs 대원들의 Mission Statement 라고나 할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씌여진, 기업의 고리타분한 그것과는 달리, 팀원들끼리 정체성과 동질감을 고무하는 날것의 느낌.

Been around the world twice. Talked to everyone once. Seen two whales fuck, been to three world fairs. And I met an old man in Thailand with a wooden cock. Pushed more peter, more sweeter and more completer than any other peter pusher around. I’m a hard bodied, hairy chested, rootin’ tootin’ shootin’, parachutin’ demolition double cap crimpin’ frogman. There ain’t nothin’ I can’t do. No sky too high, no sea too rough, no muff too tough. Been a lot of lessons in my life. Never shoot a large caliber man with a small caliber bullet. Drove all kinds of trucks. 2by’s, 4by’s , 6by’s and those big mother fuckers that go ‘Shhh Shhh’ and bend in the middle. Anything in life worth doing is worth overdoing. Moderation is for cowards. I’m a lover, I’m a fighter, I’m a UDT Navy SEAL diver. I’ll wine, dine, intertwine, and sneak out the back door when the refueling is done. So if you’re feeling froggy, then you better jump, because this frogman’s been there, done that and is going back for more. Cheers boys.

세상을 두 바퀴 돌고 모두를 만나봤지. 고래의 교미와 박람회도 봤네. 태국에서는 나무로 된 고추도 봤지. 어떤 사내놈보다 새끈하고 화끈하게 여자 맛도 봤지. 난 온 세상 전장을 누비는 식스팩, 털북숭이. 사격왕, 유격왕, 바다 사나이. 불가능 따윈 없어. 하늘도 바다도 두렵지 않아. 인생도 알만큼 알아. 강한 적은 소총으로 상대 안 하지. 온갖 트럭도 다 몰아봤지. 2륜, 4륜, 6륜 구동. 브레이크를 밟을 땐 크쉬크쉬 소릴 내는 괴물 차도 몰아봤지. 할 일은 화끈하게 몸 사리면 겁쟁이지. 난 연인, 난 용사. 난 UDT 네이비씰 다이버. 마시고 먹고 사랑하고 주둔지에서 여자 깨나 꼬셔봤지. 유감 있으면 덤벼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으니까. 건배~!!

*번역의 출처는 Google Play

 


Antifragile, Nassim N. Tal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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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The Black Swan> 에 대하여

<The Black Swan> 을 기억하는가? Darren Aronofsky 가 메가폰을 잡고 Natalie Portman 에게 오스카를 안겨 준 2010년 개봉 영화를 먼저 떠올렸다면, 당신에게 Nassim N. Teleb 이 쓴 <The Black Swan> 의 일독을 권한다. 영화에서의 ‘Black Swan’ 은 ‘White Swan’ 과 함께 인간의 양면성 혹은 선과 악의 대비를 은유하지만, Taleb 의 저작에서 ‘검은 백조’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직접 경험한 바가 없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실제로 발견되거나 일어남으로써 세상에 큰 충격을 미치는 것을 곧 ‘검은 백조’ 또는 ‘검은 백조 현상’ 이라고 하는데 – ‘Swan’ 은 우리 말로 ‘고니’ 라 하며, 하얀 색의 단일종으로만 알려져 있다가 1790년, 호주에서 영국의 John Ratham에 의해 처음으로 검은 색 ‘Swan’ 의 존재가 학계에 보고되었다. – 월가의 파생상품 트레이더였던 저자를 시대의 현자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은 그가 2007년에 <The Black Swan> 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08년 소위 ‘Lehman Brothers 사태’ 로 불리는 금융 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과격분자의 비관론으로 치부되던 그의 주장이 현실로 드러나자 언론과 학계는 앞다투어 그의 이론을 재조명하게 되었고, <The Black Swan> 은 과거의 경험으로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 사건들이 한 사회는 물론 개인의 미시적 삶에 이르기까지 치명적 영향을 미치게 된 냉엄한 시대의 현실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antifragile’ 의 의미

<The Black Swan> 을 통해 세상을 움직이는 동인에 대해 일갈했던 저자는, 이러한 ‘극단의 왕국’ 에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지에 대한 혜안을 <Antifragile> 이라는 후속작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사상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도 ‘<The Black Swan> 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납득시키기 위해 쓴 책이며, 실천을 위한 <Antifragile> 의 보조도서’ 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우선 ‘antifragile’ 이라는 생경한 단어의 의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지지만 모닥불의 불씨는 되살아 난다.”

(번역서의 문장은 “바람은 촛불 하나는 꺼뜨리지만 모닥불은 살린다.” 이지만 ‘바람’ 보다 ‘불’ 이 주어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의역하였음.)

이것이 이 책의 첫 문장인데, 사실 이 문장 하나에 이 책의 모든 메세지가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700쪽(한글 번역서 기준)이 넘는 분량의 사상과 지식을 단 한 줄의 문장에 담아낼 수 있는 그 간결함과 명료함이야 말로 이 책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충격(바람)이 닥쳤을 때, 쓰러지는 존재(촛불)가 있는가 하면 더 강해지는 존재(모닥불)이 있고, 어떤 충격이 닥칠지 함부로 예단하려는 우를 범하기 보다는 충격을 받아들여 오히려 강해질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메세지이다. (주지하다시피 ‘fragile’ 이라는 단어는 ‘부서지기 쉬운’ 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사전에는 ‘durable’ 을 포함하여 ‘내구성이 강한’ 또는 ‘충격에 잘 견디는’ 과 같은 뜻을 담은 단어들이 반의어로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충격을 받을 수록 더욱 강해지는’ 이라는 뜻이야말로 ‘fragile’ 의 진정한 반의어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antifragile’ 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제안한다고 하였다. 어찌 보면 이 ‘antifragile’ 이라는 단어 자체도 그동안 개념적으로 존재했지만 단어로 표현되지 못했던 ‘검은 백조’ 중 하나가 아닐까?)

 ‘antifragile’ 의 사례

이제 이 ‘antifragile’ 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쓸모를 갖는지 저자가 언급한 사례를 통해 살펴 보기로 하겠다. 먼저 그리스 신화로 눈을 돌려 보자면, 시칠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우스 2세가 아첨을 일삼는 다모클레스를 연회에 초대해 놓고서는 천장에 말총 한 올로 매달아 놓은 칼 밑에 앉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약간의 충격에도 말총이 끊어져 목숨을 잃게 될 수 있는 다모클레스의 처지가 곧 ‘fragile’ 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레르나 호수에는 뱀과 같이 생긴 머리를 여러 개 가진 히드라가 살고 있는데, 이 히드라의 머리를 하나 잘라내면 두 개가 자라났다고 한다. 해를 입으면 오히려 더 강해지는 히드라야 말로 ‘antifragile’ 의 상징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시계바늘을 한참 돌려 21세기 비즈니스의 세계로 옮겨 가 보자면, 약간의 충격이 삽시간에 시스템 전체로 전이되어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월스트리트는 ‘fragile’ 이 지배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불확실성이 혁신을 촉진하는 실리콘밸리야 말로 ‘antifragile’ 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Apple 에서 쫓겨난 Steve Jobs 가 Next 와 Pixar 에서 이루어 낸 혁신을 포함하여 수많은 Startup 들이 어제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더 큰 성공을 일구어 가는 밸리의 생명력이 곧 ‘antifragile’ 그 자체이다.

 ‘극단의 왕국’ 에서 살아남기 위한 ‘Barbel’ 전략

저자는 상승국면과 하강국면의 비대칭성을 이해하고 상승국면으로부터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세네카로부터 영감을 받은 ‘Barbel’ 전략을 제안한다. 이는 쉽게 말해, 바벨의 한 쪽 끝에서는 제거해야 할 리스크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반대 끝에서는 취해야 할 리스크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전략을 말한다. 현대의 직업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면, 기업 등에 소속되어 급여소득자로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Barbel’ 전략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예측하지 못한 사건 – 이를테면 갑작스러운 경제 위기 등 – 에 의한 실직이라는 최악의 리스크를 피할 수 없고, 반대로 급여소득의 일부를 재투자 하는 것 말고는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 또한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는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남긴 스탕달이나 국영 보험회사에 일하면서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한 카프카를 예로 들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기반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간 선각자들을 ‘Barbel’ 전략의 진정한 주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이자면, SK텔레콤과 SK플래닛에서 일하는 동안 훌륭한 사내 강연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는데 이 때 만나 뵌 연사 분들 중 상당 수가 ‘Barbel’ 전략의 실천자들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을 꼽자면, 정신과 의사이면서 오페라를 비롯한 클래식 문화의 Evangelist 로 활동 중이신 풍월당 박종호 대표님을 들 수 있는데, 의사라는 직업을 기저에 두고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클래식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이런 분들의 스토리가 널리 알려지고 평생 직장이 희박해져 감에 따라 제 2의 인생을 설계하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곧 불확실성의 증대에 따라 ‘Barbel’ 전략이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antifragile’ 의 윤리학

개인의 삶에 있어서 ‘Barbel’ 전략을 통해 ‘antifragile’ 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모여 사회적으로 善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자는 우리가 리스크를 감내하는 집단과 그 리스크를 감내한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취하는 집단이 상이한 사상 초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일갈한다. 2010년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에 빛나는 <Inside Job> 에서 고발한 바와 같이 ‘Lehman Brothers’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세계 금융권의 인사들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기는 커녕 그들만의 카르텔 속에서 천문학적인 이익을 취한 바 있다. 2008년의 금융위기에 단단히 한 몫한 AIG 가 CDS(Credit Default Swap) 라는 파생상품을 팔아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동안 그 직원들은 $3.5B, 한화로 약 3조 7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단기 보너스로 받았고 이 상품의 책임자 중 한 명인 Joseph Cassano 라는 사람은 혼자서 $315M, 한화로 약 3,320억원을 챙긴 바 있다. 결국 CDS 를 유동화한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에 문제가 생기고 거품이 터지자 그 피해는 고스란히 투자자들에게 돌아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AIG 의 임직원들이 챙긴 보너스에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월가의 금융권은 ‘antifragile’ 한 반면, 투자자들은 ‘fragile’ 한 입장에 처할 수 밖에 없도록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이런 시스템이 개혁되지 않는 한 제 2, 제 3의 ‘Lehman Brothers’ 사태는 또 다시 ‘검은 백조’ 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antifragile’ 과 ‘Barbel’ 전략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이 개념과 전략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특히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함으로써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정치인, 행정가들은 반드시 저자가 주장하는 프레임을 새겨두어야 할 것이고, 시민들은 투표를 포함한 정치적 의사표현을 통해 이들을 평가하고 심판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경영진의 고액 연봉과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님의 시론을 권해 드리는 바이다.)

인식의 전환, Via Negativa vs. Via Positiva

이제 제 2의 ‘Lehman Brothers’ 사태를 막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사고와 논증의 방법을 살펴 볼 차례이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Umberto Eco 는 약 3만권의 장서를 갖춘 큰 서재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데, 이 서재를 방문하는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한다고 한다. 그 중 다수는 Eco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궁금해 하는 부류이고, 그에 비해 소수인 부류는 서재를 앞으로 탐구할 서적들로 가득 찬 미지의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 한다. 후자의 인식을 ‘Eco의 반서재(Anti-library)’ 라고 하는데 ‘antifragile’ 과 같은 맥락으로 도출된 단어라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Antifragile> 의 백미는 바로 이 ‘서재에서 반서재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는 제 6권 ‘Via Negativa’ 라고 믿는다.

우리는 은연 중에 우리가 살고 있는 최첨단의 현대가 세상의 모든 진리와 비밀을 꿰뚫고 있다고 믿고 있다. ‘검은 백조’ 따위는 이미 18세기에 정복된 일이고, 바로 어제 뉴스에 보도된 과학 기사가 영구불변의 진리인양 믿으며, 오늘 소셜미디어에서 본 다이어트 식단과 운동법을 곧바로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과연 그런 첨단의 발견과 소식들은 충분히 검증된 진리인가? 그리고 그 진리의 이면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렇게 살얼음 얼어붙은 인식의 수면에 ‘Via Negativa’ 라는 묵직한 돌덩어리로 균열과 파문을 일으킨다. ‘Via Negativa’ 란 어떤 명제가 옳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가 참이 아니라는 반증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감으로써 진리의 요체와 핵심을 분명히 드러내는 과정을 뜻한다. (즉, ‘Via Positiva’ 가 찰흙을 덧발라 조각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면, ‘Via Negativa’ 는 거꾸로 소재를 깎아가면서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의학의 측면에서 이 ‘Via Negativa’ 의 적용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데, 현대의 의학이 어떤 한 증상을 완화시키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해서 우리 몸의 체계 전반에 미칠 다른 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행태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던지고 있다. 심각하지 않은 질병에 대하여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과잉 처방과 진료를 지양하고 생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한하여 첨단 의학을 적용할 것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것이 의료보험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잉진료 논쟁이 끊이지 않는 우리나라도 이런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텐데, 라식을 비롯한 시력교정술을 한 예로 들어볼 수 있겠다. 이런 획기적인 시력교정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불과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간 10만 건 이상의 시력교정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관련기사), 문제는 이러한 수술 또는 시술의 효과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혈압이나 콜레스레롤 수치가 높아지는 경우에도 그 뿌리를 찾아 해결하려는 ‘Via Negativa’ 적 접근 없이 단정적으로 혈압약 또는 콜레스테롤 저하제를 처방하는 ‘Via Positiva’ 적 접근이 의학계에 널리 퍼져있으며, 그 처방의 과학적, 의학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당당히 던질 수 있어야 한다.

‘Via Negativa’ 의 아름다움, 그리고 영화 <최종병기, 활>

Steve Jobs 와 Apple 은 ‘Less is more’ 라는 철학을 통해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핵심만을 남긴 아름다움을 탁월한 제품으로 표현한 바 있다. ‘Via Negativa’ 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 동시에 ‘antifragile’ 을 획득하는 것. 이것은 세상과 삶을 마주하는 시선과 태도에 다름 아니며, 이를 통해 단편적인 사실에 의존한 위태롭고 ‘fragile’ 한 삶에서 벗어나 보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결국 이 <Antifragile> 이라는 방대한 지적 성취물은 개인의 자유와 삶의 주체성을 되찾는 여정이 아닐런지. 그래서인지 나는 이 <Antifragile> 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Nikos Kazantzakis 의 <Zorba, The Greek> 를 떠올렸고, 그 느낌을 저자인 Nassim N. Taleb 에게 twitter 를 통해 전달한 바 있는데, 영광스럽게도 Taleb 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회신을 얻을 수 있었다.

To  I’m your huge fan in Korea. On <Antifragile>, I felt that ‘Zorba The Greek’ was the icon of Antifragilistas. What’s your idea?

To  Indeed!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문득 내 머리 속에 스쳐가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으니 바로 <최종병기, 활> 의 마지막 장면이 그것이다.

<최종병기, 활> 마지막 장면 YouTube 바로가기 (Click Here)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 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 남이(박해일 扮)

Nassim N. Taleb 이 본다면 아주 기뻐할 대사가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Antifragile> 의 일독을 권하며 긴 글의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