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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그리고 포커

포커 용어

블러핑(Bluffing) : 낮은 패를 가지고서 마치 높은 패를 가진 양 허세를 부리며 공격적으로 베팅하는 전략.

슬로우 핸드(Slow hand) : 블러핑과 반대로, 높은 패를 들고서도 상대방이 자신의 패를 얕보도록 낮게 임하는 전략.

나는 포커를 즐겨하지는 않지만, 포커판을 인생에 비유하는 경우를 종종 접하다 보니 위의 용어들이 무슨 뜻인지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런데 포커를 칠 일도 없는 나의 뇌리에 이 두 단어가 스쳐지나간 것은 뜻밖에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빗발치는 통신사 광고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트위터의 검색창에 ‘통신사 광고’ 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보시라. 차마 눈 뜨고 보기도 힘든 비난의 글들이 타임라인을 가득 메우게 될 것이다. 광고에 대해 호불호가 엇갈릴 수는 있다고 하지만, 내가 작금의 상황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사람들이 통신사 광고를 가히 공해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또한 특정 광고주에 대한 평을 가급적 자제할 수 밖에 없는 업계(광고 및 미디어) 종사자들 마저도 통신사 광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것을 보면서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생경한 포커 용어를 떠올리게 된 것은, 1위 사업자이자 나의 전 직장이기도 한 SK텔레콤의 <잘 생겼다, LTE-A> 광고가 전형적인 ‘블러핑’ 으로 느껴졌지 때문이다. LTE 서비스가 시작된 2011년 하반기 이후로 통신3사는 고객들이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통신용어들을 쏟아내며 서로의 네트워크 품질이 우월하다는 경쟁 광고를 지속해 왔고,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은 “SK텔레콤 고객이라면 신경 꺼두셔도 좋습니다.” 라는 슬로건과 함께 이 지난한 논쟁을 끝내고 싶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TV 광고에 등장하는 배우 이정재의 웃음이 한껏 과장된, 전형적인 ‘블러핑 스마일’  로 느껴졌다. 1위 사업자이자 미래부 주관의 <2013년 통신서비스 품질평가>에서도 1위를 차지한 SK텔레콤의 네트워크 품질이 타사의 그것에 비해 낮을 리 만무함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에는 분명 더 강하게 보이려는 의도와 숨길 수 없는 조바심이 뭍어난다.

이제 잠시 시계바늘을 돌려 1998년으로 가 보자. 그 곳엔 지금 보아도 아련한 감동이 느껴지는 Speed 011 광고가 있다.

<Speed 011 : 산사편_YouTube 바로가기>

“또다른 세상을 만날 때에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라는 카피는 지금의 “신경 꺼두셔도 좋습니다.” 와 놀랄만치 닮아 있고, 당대의 배우들인 한석규와 이정재를 모델로 기용한 캐스팅 전략 또한 판박이다. 그런데, 한석규는 이정재처럼 과장된 웃음을 짓는 대신 담양의 대숲을 스님과 함께 걸을 뿐이다. 포커 얘기로 돌아가자면 ‘블러핑’ 이 아니라 전형적인 ‘슬로우 핸드’ 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이 광고처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사람을 향합니다> 광고 영상을 페이스북에 업로드 했더니, 모 기업의 커뮤니케이션 담당 팀장님께서 “1위 사업자라서 가능한 광고군요.” 라고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나 역시 100% 동감한다. ‘슬로우 핸드’ 플레이는 진정한 강자만이 쓸 수 있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 <Speed 011 : 산사편> 을 떠올리게 하는 캠페인을 보게 되었는데, Volkswwagen Aregentina 의 <Volkswagen Suite> 이 바로 그것이다.

<Volkswagen Suite_YouTube 바로가기>

폭스바겐을 타고 운전하는 여행자들이 편하게 쉬고 갈 수 있도록 깨끗이 개조한 모텔을 정성스러운 서비스와 함께 제공하는 캠페인인데, “Because some times not driving is driving cafully.” 라는 슬로건이 마치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를 연상케 한다. 자동차 회사가 운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통신사에 전화기를 꺼두라고 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맥락의 메세지라고 본다. 이것은 곧, 진정한 강자만이 쓸 수 있는 ‘슬로우 핸드’ 전략에 다름 아니다.

이런 ‘슬로우 핸드’ 전략을 쓸 수 있으려면 경쟁자를 의식하는 대신, 고객을 바라봐야 한다. “경쟁자보다 내가 ‘더’ 잘 나가~!!” 라고 안쓰럽게 외칠 것이 아니라, 나와 고객과의 관계를 깊이 성찰하는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감정적 연계의 고리를 이끌어 내어야 할텐데, 이미 SK텔레콤은 이와 유사한 훌륭한 경험을 갖고 있다.

<SK텔레콤 : 사람을 향합니다 시리즈_YouTube 바로가기>

이 영상들을 잘 보면, 하나같이 고객들의 경험에 집중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어디에서도 “내가 제일 잘 나가~!!” 라는 외침은 찾아볼 수 없고,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정성과 겸손함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래 전의 일이 아니고, 상황이 생각만큼 많이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SK텔레콤의 자부심이 조바심으로 바뀌어간다는, 지극히 내부적인 상황일 뿐이다. SK텔레콤이 스스로를 진정으로 고객의 마음 속에 최고의 사업자라고 자부한다면, ‘생겨줘서 고맙다’ 고 자축할 것이 아니라 , 세상을 떠난 딸의 목소리를 음성사서함으로 밖에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다독이는 겸손함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강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슬로우 핸드’ 플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