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잭 내셔

몰입하거나 혹은 분노하거나

월드컵, 총성없는 전쟁

월드컵은 4년에 한 번 씩 돌아오는 총성 없는 전쟁과도 같다. 그리고 그 전쟁은 약 7,000 제곱미터 남짓한 pitch 뿐만 아니라 그 밖에서도 벌어지는데, 무려 22억명(2010 남아공 월드컵 경기를 20분 이상 TV로 시청한 사람의 숫자. 출처 :  FIFA) 이 넘는 전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브랜드들의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대형 스포츠 이벤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스포츠 브랜드들은 월드컵 캠페인에 가히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시켜 왔으며, 2014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을 두 달 여 앞둔 지난 4월 1일, Nike 가 드디어 ‘Risk Everyhing’ 이라는 슬로건의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riskeverything

‘Risk Everything’ YouTube 영상 바로가기 (Click Here)

 

 ‘Risk Everything’, 1분 14초의 마법

이 캠페인의 메세지는 간결하다. 이번 월드컵에 출전하는 최고의 수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Cristiano Ronaldo, Wayne Rooney, Neymar Jr., 세 선수가 경기장으로 입장하기까지의 긴장된 발걸음을 담담히 담아내었을 뿐. 하지만, 이 1분 14초 길이의 캠페인 영상을 보기 전과 보고난 후 당신의 심장 박동 수는 분명 달라져 있을텐데, 그것은 바로 이 영상이 선수들과 팬들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팬들로 하여금 선수들이 느낄 중압감에 스스로를 이입시키게끔 정교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앵글은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고, 메트로놈처럼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시나브로 빨라져가고 있으며, 선수들이 용수철처럼 pitch 로 뛰쳐 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Pressure shapes legends. Risk everything.’ 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한다. 어떤가? 이 1분 14초의 짧은 경험동안 당신은 비판 어린 눈초리로 승리를 종용하는 극성맞은 팬에서 선수들의 중압감을 함께 짊어진 존재로 변모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Red Sun ~!!!

 

묘한 Contrast, 김연아와 대한민국

Nike 의 멋진 캠페인을 보면서 나의 뇌리 속에 비슷한듯 전혀 다른 한 편의 광고가 떠올랐다. 지난 Sochi 올림픽 때 국내 모 브랜드에서 전개했던 김연아 선수를 모델로 한 광고였는데, 이 광고는 팬들에게 엄청난 반감(관련 기사)을 불러일으킨 채 조기에 종료되고 말았다.

김연아

* 사진 출처 : Tistory blog

Nike 의 월드컵 캠페인과 마찬가지로 이 광고 역시 국가대표 선수로서의 책임감과 중압감을 담아내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전문가들은 다양한 원인을 지적하고 있지만, 결국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메세지가 팬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로 수렴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런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과연 그 이유가 전부일까?

 

인칭과 시점의 문제

모든 이야기에는 ‘인칭’ 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주지하다시피,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인칭’ 에 따라 서로 다른 느낌을 전달할 수 있으며, 적절한 ‘인칭’ 과 ‘시점’ 을 선택하는 것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Nike 의 캠페인은 전형적인 1인칭 시점의 이야기이다. 세 명의 수퍼스타들을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인 한 개인으로 치환시키기 위한 선택이리라. Nike 의 과거 캠페인, 예를 들어 Eric Cantona 가 등장하는 ‘Match in hell‘ 을 보면 이번 캠페인과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을텐데, 이것은 마치 ‘Dark Knight’ 전후의 ‘Batman’ 시리즈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가져다 주며, 이러한 1인칭 시점은 팬들로 하여금 수퍼스타와 수퍼히어로의 활약을 박수치며 응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내면으로 함께 침잠하는 경험을 가능케 한다. 또 한 가지 Nike 캠페인에 가산점을 주고 싶은 이유는 이 캠페인이 1인칭과 2인칭의 묘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다는 점인데,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카메라의 앵글들이 마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수퍼스타의 바로 옆에 서 있는 팀 동료로 느끼게 함으로써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전지적 시점의 나쁜 예

반면, 김연아 선수 광고의 경우 전형적인 전지적 시점을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신의 계시, 절대자의 목소리처럼 ‘너는 대한민국이다’ 라고 웅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점과 서술로 인해 보는 사람과 김연아 선수와의 거리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 이후, 김연아 선수의 복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고, 이런 어려움을 딛고 출전한 김연아 선수에게 많은 팬들이 안쓰러움과 미안함마저 갖고 있던 상황에서 전지적 시점을 채택한 것이 이 광고의 결정적 패착이 아니었다 싶다. (사실 최근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이런 전지적 시점의 접근이 역효과를 불어일으킨 경우는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최연혜 철도청장의 ‘어머니의 마음’ 발언인데, 이 발언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기는 커녕 대단히 월권적인 뉘앙스로 전달되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보다 분노를 초래한 바 있다.)

 

 광고와 컨텐트, 희미하지만 분명한 경계

‘광고보다 컨텐트’ 라는 것이 업계의 화두가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 둘 사이의 희미한 경계 어딘가 쯤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경계를 규정하는 수많은 기준들이 있겠지만, Nike 와 국내 모 브랜드의 사례를 나란히 놓고 보면서 결국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어디에 두게끔 하느냐가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저명한 협상전문가인 Jack Nasher 는 <Deal> 이라는 저서를 통해 ‘멋진 전지가위를 팔아요.’ 라고 말하기 보다는 ‘당신의 정원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있어요.’ 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 바 있다. 보는 사람과 이야기의 화자를 가깝고 나란히 둘 것인가, 혹은 더욱 멀리하여 소원하게 만들 것인가? 광고와 캠페인을 제작한다면 한 번 쯤 곱씹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