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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美食 의 가벼움

Mark Rothko 展 을 다녀왔다. 전시를 보기 전까지 나는 Mark Rothko 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인 몇 가지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사각의 프레임과 색상만으로 표현한 색면추상들을 통해 작가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Steve Jobs 가 생의 마지막에 그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다든지, 그의 작품이 1천억원을 호가한다든지 하는 사실은 그저 전시의 흥행을 위한 가쉽거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시의 동선은 작가의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모티브를 두었던 ‘신화의 시대(Age of Myth)’, Multiform 이라는 독특한 화풍을 통해 색면추상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던 ‘색상의 시대(Age of Colour)’,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꿈꿨던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 낸 ‘황금기(Golden Age)’ 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품 활동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 만한 많은 작품들이 서울을 찾은 것은 실로 행운이라 할 만 했는데, Mark Rothko 라는 작가가 반 세기 남짓한 활동으로 만들어 낸 Context 가 너무나 선명했던 덕분에 마지막으로 그의 무제(Untitled) 작품 앞에 섰을 때의 울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즐기고 그것으로부터 감동을 얻고자 한다면 무릇 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치 절대음감처럼 어떤 상황, 어떤 맥락에서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감동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절대적인 미감을 소유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도 하거니와 그런 사람조차도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그 대상을 관조한다면 분명 더 큰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리적인, 혹은 화학적인 특성을 측정하고 분석하는데 그치는 도구가 아니며, 총체적인 해석을 통해 기계가 이를 수 없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축복과도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탐닉하고 있는 식도락에 있어서도 나의 이러한 믿음은 확고하다.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 보자면, 많은 분들께서 블로그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하고 참고하는 소위 <OO 음식의 XX대 맛집> 과 같은 리스트들은 맛을 즐기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Context 를 결여하고 있는 반쪽 짜리 – 솔직한 심정으로는 반쪽에도 한참 못 미친다고 믿지만 – 정보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징기스칸의 몽고군처럼 소위 ‘맛집’ 이라고 하는 곳들을 질풍과도 같이 휩쓸고 다니면서 승리의 깃발을 꽂고 왕성한 정복욕을 자랑하는 이런 블로거들에게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미술 얘기로 잠시 돌아가자면, 전세계 미술관들을 누비며 경매가 Top 100 을 기록한 명작들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 한데 모은 것에 비교할 수 있겠다. 그런 사람들에게 훌륭한 비평을 기대할 수 없듯이 맛집들을 바삐 누비고 다는 이들의 혓바닥에도 특별한 감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수요미식회> 라는 TV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넘쳐나는 흥미 위주의 음식 관련 프로그램 중에서 차별화되는 포지셔닝을 염두에 둔 듯 한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결론은 이 프로그램이 TV버전의 <OO 음식 3대 맛집>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공유되는 포스팅들은 다수의 참여나마 수반되지만, 이 프로그램은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명성에 기대어 이런 류의 순위 매기기를 자행한다는 점에서 한층 더 처참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채널을 돌려 버렸던 장면은 ‘자장면’ 편 – 사실 이런 류의 기획에 왜 자장면, 떡볶이, 돈까스 같은 메뉴가 등장하는지 좀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메뉴들은 그저 기분에 따라 즐겁게 맛보면 될 뿐, 사실 ‘미식’을 논할 만한 여지가 많지 않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 에서 어느 중화요리집의 수타 자장면에 대해 황교익 씨와 김희철 씨가 전혀 다른 평을 할 때였다. 황교익 씨는 수타면의 굵기가 상당히 고른 편이라서 높게 평가한 반면, 김희철 씨는 굵기의 편차가 심할 정도로 커서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평을 내 놓았다. 같은 음식에 대해 상반된 경험을 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 못하고 갸우뚱 거리는 장면은 우습기 까지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의 단골도 아닌 사람들이 한 두 번 가 본 경험을 놓고 ‘미식’ 을 논하고 있으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사견임을 전제로, 황교익 씨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이 분께서는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메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전문적인 음식평론가로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해의 ‘깊이’와 ‘폭’ 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혔을 때, 그것은 오롯이 나만의 산 지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식문화는 지금 그 폭에 비해 깊이가 한없이 부족한 기형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유서깊은 Tailor’s shop 이 백화점이나 트렌디한 편집 매장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대를 이어 Tailor’s shop 을 찾는 손님들이 존재하는 덕분인데 이 손님들이 Tailor’s shop 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재단사와의 오랜 ‘관계’ 라고 할 수 있다. 식도락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요리사, 혹은 그 집의 주인과 얼마나 오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런 관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햇살 좋은 주말 오후에 즐겨찾는 음식점이 있다. 재료를 신선하게 쓰고 조리의 기본을 탄탄히 해서 좋아하는 곳인데, 얼마 전에 내가 좋아하던 Egg Benedict 가 메뉴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 아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다시 찾았더니 주문을 받는 직원분께서 이르기를, “지난 번에 Egg Benedict 가 메뉴에 없어서 아쉬워 하시는 것을 보고 다음에 오시면 꼭 해 드리도록 셰프님께 얘기해 놓았는데, 오늘 셰프님께서 몸이 안 좋아 결근하신 관계로 괜찮으시다면 디저트를 한 가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설령 디저트를 내어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단골의 반응을 기억하고 주방에 전달한 것만으로도 나는 이 직원분과 레스토랑에 기꺼이 박수를 쳐 드릴 수 있다. 그리고 단골에 대한 이런 수준의 배려가 존재하는 한 나는 이 레스토랑을 계속해서 찾을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은 경험들이 맥락을 이루어 이 곳에 대한 나의 만족을 배가 시켜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칼 대신 스마트폰을 든 맛집 정복자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인 경리단길 깊숙한 곳에 <한국술집 안씨막걸리> 가 있다. 원래도 좋은 전통술을 맛보고 싶을 때 종종 찾았었는데, 최근에는 훌륭한 셰프님이 합류하여 음식의 맛이 풍성해 졌다. 하루는 낙지요리를 맛있게 먹었는데 낙지도 훌륭했지만 같이 버무려진 무 생채가 아삭하니 아주 마음에 들었다. 흔하디 흔하게 맛 볼 수 있는 숨이 푹 죽은 무채와는 사뭇 다른 맛이었고, 셰프님께 맛있게 먹었다는 말씀을 전해 드렸다. 셰프님 또한 아삭한 무 생채를 좋아하신다며 다음에 오면 무 생채를 좀 더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런 교감으로 인해 나와 셰프님, 그리고 음식점 사이에 하나의 맥락이 형성될 수 있고, 이런 맥락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기회들로부터 타인의 경험에 의존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혀 끝의 즐거움이 배어나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언제나 요리사와 마주할 수 있는 주방 앞 자리 – 영어로는 bar, 일본어로는 だい(다이) – 이다. 내가 오랜 시간 즐겨찾는 음식점들 또한 이런 구조를 갖춘 곳들이 많다. 일식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어쩌면 이런 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요리사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무엇보다 음식의 맛을 배가시켜준다. 무릇 좋은 요리사라면 분명한 의도를 갖고 요리를 만들게 마련이고, 그 의도를 혀 끝만으로 파악하기엔 내 미각이 한없이 둔감할 뿐이다. 미술작품의 이해를 위해 도슨트가 존재하듯 음식을 마주할 때도 누군가의 설명이 더해진다면 맛을 즐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물며 요리를 만든 요리사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마치 작가 스스로 작품을 설명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일테니까.

새로운 맛집을 찾아가 보는 것도 적잖은 즐거움일 수 있다. 경험의 ‘폭’과 ‘깊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또한 개인의 성향에 따를 일이다. 하지만 음식을 앞에 두고 한 번 쯤 자문해 볼 필요는 있겠다. “내가 이 음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 혀 끝으로 이 음식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배를 채울 요량이라면 생략해도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그 음식으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던져 볼 질문이다. 질문을 던질 가치가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면, 음식점을 자주 찾아가서 다양한 맥락에서 음식을 맛보고 요리사 또는 주인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시나브로 이 질문들에 대해 ‘Yes’ 라고 답할 날이 올 것이고, 그 때의 즐거움은 결코 ‘Like’ 와 ‘Share’ 를 통해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감동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食道樂’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