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드리워진 Gresham의 망령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영국의 경제학자 Thomas Gresham 에게는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그가 주창한 Gresham’s law 를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에 묘사하는데 어쭙잖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화폐금융론 등의 경제학 과목에서 화폐의 역사를 공부할 때 꼭 등장하는 법칙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이 바로 Gresham’s law 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라는 문장으로 유명한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보관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화폐의 특성상 좋은 돈, 즉 주화의 원재료인 금과 은 등의 함량이 높은 돈은 금고에 쌓이게 되는 반면, 나쁜 돈, 즉 원재료의 함량이 낮은 돈만 주로 유통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법정통화, 즉 중앙은행이 그 가치를 보장하는 현대의 화폐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주화 자체가 곧 가치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따라서 함량 미달의 주화가 통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부와 중앙은행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현대의 법정통화에는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지 모르나 내 소견으로는 빳빳한 새 지폐는 지갑 속에 아껴두고 쭈글쭈글한 헌 돈을 먼저 쓰는 것도 이 법칙이 사람들의 심리에 남겨 둔 흔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구축(驅逐)’ 이라는 한자어는 한시 바삐 폐기되어야 마땅할 듯 싶다. ‘몰아낼 구’ 에 ‘쫓을 축’ 이 더해진 조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좀체 쓰지 않는 표현이므로 그냥 쉽게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 로 쓰더라도 충분히 그 뜻이 통하지 않을까 싶다. 영어로도 ‘drive out’ 이라고 쓴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고 화폐시장을 잠식하게 되면 경제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신뢰(trust) 가 무너진다. 당신이 물건을 사고 팔 때 주고 받는 돈의 가치를 100%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떻게 거래가 성사될 수 있겠는가? 각자가 저마다의 저울을 짊어지고 다녀야 할테고 이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낭비를 초래하게 된다. 시장에 규율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면 아마 그 경제는 교환경제 이전의 자급자족 경제로 회귀할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이런 지경에 처해 있다. 문제는 이 Gresham 의 망령이 화폐가 아닌, 이 사회 전반에, 그것도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상권

신촌, 홍대, 가로수길, 경리단길. 밀레니엄 이후, 이 따분한 도시 서울에 그나마 빛과 소금 같은 활력을 불어넣었던 지역들이다. 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초기의 상인들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몰리면 몰릴수록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임대료가 오르면 오를수록 따분한 취향의 대형 자본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가던 경리단길의 한 술집에 앉아 맞은 편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시뻘건 간판을 보면 짜증마저 솟구친다. 대형 자본의 허접한 취향이 지역을 살리는 우아한 취향을 몰아내고 있다.

#2. 정치인들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사는 군부를 위시한 기득권층과 이에 맞서는 민주화세력 간의 충돌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기득권층에서는 끊임없이 그 권력을 세습하는 반면, 민주화세력은 새로운 세대에게 배턴을 물려줄 전략도 의지도 없이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다. 능력있는 젊은 인재들은 흐린 물에는 발조차 담그려 하질 않으니, 인사청문회장은 정화조가 되어가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지방자치제는 현대판 음서제로 썩어가고 있다. 대의를 책임질 깜냥이 안되는 얼치기 정치꾼들이 자격있는 새로운 세대를 몰아내고 있다.

#3. 정명훈과 안현수

정명훈 씨는 한국 사회에 큰 빚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에스트로는 고국을 택했고 덕분에 우리는 훌륭한 음악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 역시 서울시향의 정기공연에서 훌륭한 무대에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러시아로 떠난 쇼트트랙 챔피언은 어떠한가? 본인은 애써 ‘그저 달리고 싶었다’ 라고 말을 돌리지만 그 표정에 묻어나는 진심은 그의 말처럼 간단치 않았다. 천박하고 추악한 다툼들이 거장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있다.

이렇게 다 몰아내고 나면 과연 우리 앞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진심으로 걱정이 앞선다. 악화가 시장을 잠식하면 교환경제가 무너지고 자급자족경제로 회귀하게 되듯이, 우리도 각자도생의 처절한 사투에 임하게 되지 않을까? 정부가 할 일이 곧 악화를 가려내는 저울의 역할일진대, 내가 보기엔, 그리고 많은 분들의 생각에 비추어 보건대, 지금의 정부는 눈금이 없는 저울과도 같다. 뻔뻔하게 악화를 들이미는 무뢰배들이 판치는 꼴을 눈 뜨고 볼 생각을 하니 다가오는 2015년이 암담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말,

서두에 밝혔지만, 사실 Gresham’s law 는 보관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화폐의 특성에 기인한 법칙이다.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몰아낸다라는 무척 단순한 메세지 때문에 다른 현상에도 쉽게 빗대어 쓸 수 있는데, 나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이런 愚 를 범한 것에 대해 글을 읽는 분들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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